기억의밤

참 신기해. 봐야 할 순간에 보게 되는 영화.

by 정오의 햇빛

기억의 밤, 그리고 가족이라는 이름

이런 영화가 있었는지도 몰랐는데, 어쩌다 보게 되었다.
그런데 오늘, 나는 이 영화를 봐야만 했던 것 같다.


영화 속 주인공은 끔찍한 살인을 저지르고, 그 충격으로 기억을 지운다.
기억을 잃은 채로 그는 살아간다. 살아간다기보다, 목숨만 이어간다.
그러다 결국 사라졌던 기억이 되살아난다. 아니 집요하게 주변이 되살려낸다.
하지만 그 기억은 떠올라서는 안 되는 기억이었다.
살기 위해 지워야 했던 기억이었다.

기억이 돌아오자 그는 결국 스스로 생을 끊는다.


나는 영화를 보며 생각했다.
기억이라는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오늘 아침, 나는 가족에 대해 생각했다.
나는 늘 언니, 오빠, 엄마, 아버지를 나의 가족이라고 믿고 살아왔다.
그런데 그들이 보여준 모습은, 내가 알고 있던 ‘가족’의 모습과는 너무 달랐다.


나는 늘 슬펐다.
왜 나에게 그렇게 했을까.
왜 어린아이에게 그렇게까지 했을까.

그 질문은 오랫동안 나를 붙잡고 있었다.
이해할 수도 없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은 채 기억은 쌓여갔다.

그 기억들은 가만히 잠들어 있다가 어느 날 갑자기 순간순간 떠올랐다.
그러면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살아 있는 것 같지 않은 하루를 보내고, 간신히 그 기억을 가라앉히며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또 반복되었다.


그런데 오늘 아침, 그 기억이 조금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처음으로 이런 생각을 했다.

“그들은 나를 가족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 생각을 하는 순간, 내가 평생 붙잡고 있던 질문이 무너졌다.

“가족인데 왜 나를 사랑하지 않았을까” 이 질문은 더 이상 성립하지 않았다.

애초에 그들에게 나는 사랑해야 할 가족이 아니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동안 ‘가족’이라는 말을 동화책이나 텔레비전에서 본 모습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서로를 돌보고, 보호하고, 어린아이를 품어주는 그런 형태의 관계.

하지만 내가 있던 곳은 그런 의미의 가족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곳에는 그저 살아가기 위해 모여 있는 사람들,
모두 자신을 감당하기에도 벅찬 상태의 사람들만 있었을 뿐이다.

누군가는 아버지였고, 누군가는 어머니였고, 누군가는 형제자매였지만, 그 역할을 감당할 수 있는 상태의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나는 누구였을까.

그들에게 나는 갑자기 태어난 아이,
누군가가 책임져야 하지만 누구도 감당할 수 없었던 존재였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자 그들의 행동이 조금은 이해되기 시작했다.


이해가 된다는 것이 덜 아프다는 뜻은 아니다.

여전히 나는 슬프다.

여전히 묻고 싶다.

왜 어린아이에게 그렇게 했을까.

하지만 이제는 안다.


그 질문은 누군가의 악의 때문이 아니라, 누군가의 결핍 때문일 수도 있다는 것을.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사랑할 수 없는 상태였을 수도 있다는 것을.

나는 여전히 그 사실을 완전히 받아들일 수는 없다.


그들을 가족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도, 나를 가족이 아니었다고 인정하는 것도 너무 견디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나는 하나를 알게 되었다.

나는 틀리지 않았다는 것.

내가 느꼈던 슬픔은 과장된 감정도, 잘못된 해석도 아니었다.

그저 사랑이 있어야 할 자리에서 사랑을 받지 못한 아이의 정직한 반응이었을 뿐이다.


기억은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기억을 바라보는 시선은 변할 수 있다.

오늘, 나는 그 변화를 처음으로 경험했다.

그리고 그 변화는 나를 조금 더 무너지게 했지만, 어쩌면 나를 조금 더 자유롭게 할지도 모른다.

아직은 아니지만.


그들에게 나는 가족으로 인식되지 않았다는 생각을 하는 것은 예전에는 불가능한 생각이었을 것같다.

영화에서 주인공이 살인의 기억을 완벽하게 지워버렸듯이 가족으로 여겨지지 않는다는 생각은 존재를

위협하는 생각이었을 것 같다.


오늘 아침 처음으로 우리는 가족으로 서로에게 인식되지 못한 관계였으리라는 생각을 한 것 만으로도 하루가 허공에 떠버렸다.


이 나이에도 그게 그렇게 충격일 일인걸까? 충격적인 일이었다. 한참을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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