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가 가져온 생각의 변화

삼백오십시간의 상담을 하면 생각이 변할 수 있으려나?

by 정오의 햇빛

브런치에 글을 삼백오십 개쯤 썼다. 적지 않은 시간과 노력이 들어간 일이다. 글을 쓴다는 건 결국 시간을 떼어내는 일이고, 생각을 붙잡아 정리하는 일이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묻게 된다. 이 많은 글이 나를 무엇으로 바꾸었는가. 만약 아무런 변화도 없다면, 이 일은 도대체 왜 해야 하는가.

그래서 아직 알 수 없으니까, 변화가 있는지 스스로 확인해보자는 마음으로 또 글을 쓴다.


오늘 아침, 잠에서 깨어났을 때 몸을 일으킬 수가 없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반복되어 온, 너무 익숙한 감각이었다. 일어날 수 없다. 움직일 수 없다. 예전의 나는 그것을 게으름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를 몰아붙였다. 주먹을 쥐고, 일어나라고, 움직이라고, 일을 해야 사람이 되는 거라고 스스로를 다그쳤다. 나는 늘 그렇게 맞으면서 일어났다. 나 자신에게.


그때는 생각할 틈도 없었다. 계속 무언가에 끌려다니며, 내 안에 어떤 생각이 있는지 돌아볼 여유 자체가 없었다. 너무 힘들어서 움직이지 못한다는 가능성은 떠올릴 수도 없었다.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처음으로 인정하게 되었다. 무슨 생각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이 생각이 너무 무거워서 내가 몸을 일으킬 수 없다는 것을. 이렇게 힘든데 일어나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을. 그래서 그냥 가만히 있었다. 일어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힘든데, 굳이 일어나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가만히 있는 동안, 막연하던 감각은 점점 구체적인 생각으로 올라왔다. 그리고 마지막에 도달한 문장은 이것이었다.

그들이 나에게 야박했던 것이 아니라, 애초에 그들의 안중에 나는 없었다는 것.


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않는 사람이었다. 만져지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들 앞에 서 있어도 부딪히지 않는, 실체 없는 존재. 마치 홀로그램 같은 사람이었다. 보이기는 하지만, 없는 것과 같은 존재.

하지만 나에게 그들은 홀로그램이 아니었다. 분명히 느껴지고, 만져지고, 관계의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엄마였고 아버지였고 언니였고, 오빠였다. 나는 그 관계를 느끼고 있었지만, 그들은 나와 관계 맺지 않았다.

나는 그 이유를 몰랐다. 왜 이런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저 어리둥절한 채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 채로 시간이 흘렀다. 그렇게 나이가 들고, 어른이 되고, 이제는 삶의 끝을 생각할 나이가 되어, 비로소 하나의 전제를 알게 된 것 같다.


그들은 왜 나에게 그랬을까가 아니라, 애초에 그들에게 나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

이 전제를 받아들이는 순간, 내 삶의 많은 장면들이 설명된다. 더 이상 ‘왜’라고 묻지 않게 된다. 대신 이렇게 말하게 된다.

아, 그래서 그랬구나.

그들은 그런 상태였구나.


이 문장에 도달하고 나니, 이상하게도 감정이 따라오지 않는다. 야속함도, 원망도, 슬픔도 머무르지 않는다. 감정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붙잡을 자리를 잃은 것 같다.


어쩌면 이것이 내가 삼백오십 개의 글을 쓰면서 얻은 변화일지도 모른다. 설명되지 않던 삶을 하나의 문장으로 정리할 수 있게 된 것. 그리고 그 문장이 더 이상 나를 찌르지 않게 된 것.

글은 나를 바꾸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나를 여기까지 데려왔다.


그들이 왜 그랬을까? 라는 평생의 질문은

애초에 그들의 마음속에 나는 존재하지 않았다. 라는 명제로 바뀌었다.

그리고 그걸로 그만인 일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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