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을 얻은건가? 질문이 바뀐건가?
그래, 그 질문에는 슬픔이 있다.
“그들은 왜 나에게 그랬을까.”
이 질문은 단순한 궁금증이 아니다.
이해하려는 시도이면서 동시에, 이해함으로써 버텨내려는 몸부림이다.
나는 평생 그 질문을 붙잡고 살았다.
남편은 왜 그랬을까.
시어머니는 왜 그랬을까.
시누이들은 왜 그랬을까.
세상 사람들은 왜 그런 모습일까.
그리고 나는 늘 답을 만들어냈다.
아, 그래서 그러는구나.
그 답은 나를 지켜주는 장치였다.
이유를 알면 덜 아프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영문 모르는 상처는 견디기 어렵지만
이유가 있는 상처는,
적어도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여지를 남긴다.
“그건 정당하지 않아.”
“나는 받아들이지 않겠다.”
이렇게 말할 수 있으니까.
그래서 나는 이해하는 사람이 되었다.
이해함으로써 무너지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그런데, 그 질문의 시작으로 돌아가 보면 거기에는 여전히 한 아이가 서 있다.
“그들은 어린 아이에게 왜 그랬을까.”
참 예쁜 아이였을 텐데.
참 착한 아이였을 텐데.
요구도 없이 조용히 자기 자리를 지키던 아이였을 텐데.
그 아이는 이유를 몰랐다.
그래서 더 아팠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나는 결국 하나의 답에 도달했다.
그들에게는 나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동생이 없었고 그 여자에게는 딸이 없었다.
그건 미움보다 더 차가운 상태였다.
‘없음.’
존재하지 않는 사람은 사랑받을 수도, 미움받을 수도 없다.
그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런데 나는 기억한다.
강아지가 있었다.
조카도 있었다.
그들은 강아지와 조카를 보며 웃었고, 아낌없이 애정을 주었다.
나는 그 장면을 보며 알았다.
“나는 저 강아지보다도 덜 존재하는구나.”
그 감정은 설명하기 어렵다.
부러움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깊고, 서러움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오래된 감정이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강아지를 마음껏 예뻐할 수 없다.
귀여움을 느끼는 순간에도 그 밑바닥에서 지워지지 않는 비교가 올라오기 때문이다.
강아지만도 못했던 나의 위치. 강아지 만큼의 기쁨도 주지 못하던 존재. 아예 관계없는 존재
함께 밥먹고 함께 잠자고 한 공간에 있었지만 장롱이나 쓰레기통 같은 존재. 아니 그런 존재도 아니다.
필요하지도 않은 존재. 그냥 그림자 같은 존재? 무엇의 그림자였을까? 존재의 그림자였구나.
나는 그 감정을 안다.
그래서 외면할 수도 없다.
이제 나는 묻는다.
그 답을 알게 되었으니까, 이제 괜찮은가.
후련한가.
개운한가.
살만해졌는가.
정말로?
나는 안다.
이 질문의 끝에는 ‘이해’가 아니라 ‘결핍’이 남아 있다는 것을.
나는 평생 누군가를 가족으로 마음에 들이지 못했고, 누군가의 마음 안에 가족으로 들어가 본 적도 없다.
그 사실은 어떤 해석으로도 지워지지 않는다.
이해는 가능하지만 대체되지는 않는다.
그래서 나는 이제 다른 질문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들은 왜 그랬을까”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아니 이제 더이상 질문이 없는 삶을 어떻게 유지할 것인가?
이 질문은 이해로 나를 지키는 단계에서 존재로 나를 세우는 단계로 넘어가는 질문이다.
나는 여전히 그 아이를 안고 살아간다.
그 아이는 이유를 알아도 울고, 이유를 몰라도 운다.
그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설명이 아니라 존재의 확인일지도 모른다.
“너는 있었다.”
“너는 여기 있다.”
“너는 사라진 적이 없다.”
어쩌면 이제야 처음으로 그 아이에게 가족이 되어줄 수 있는 건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묻는다.
이제 충분한가?
아니, 아직은 아니다.
하지만
이제는 방향이 조금 바뀌었다.
나는 더 이상 그들이 왜 그랬는지를 묻지 않아도 된다.
이제는
내가 나를 어떻게 존재하게 할 것인가를 조금씩 배워가며 살아간다.
존재의 소멸이 가까와 온 지금 나는 허겁지겁 존재해야 한다.
존재하지 않는 것은 소멸할 수도 없다.
소멸하기 위해 존재해야 하는 이 시급함과 절박함.
그냥 하루하루 허무에 빠져 살다가 흐지부지 되어버릴 삶이었다.
브런치에서 글쓰기를 하다가 일생 해보지 않은 사유의 다른 장을 열게 되었다.
어쩌면 이제 나는 사라져도 될 것 같다.
드디어 브런치라는 이 공간에서 존재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