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덜 배고픈건가?
나는 이제 친구가 없다.
이 문장은 사실을 말하는 것 같지만,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더 이상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관계를 유지하고 있지 않다’에 가깝다. 한때는 아주 가까웠던 사람이 있었다. 서로의 시간을 아끼지 않았고,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고 믿었던 관계. 그러나 지금은 돌이킬 수 없는 상태로 끝나버렸다. 그 관계가 끝나면서 단순히 한 사람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친밀함’이라는 감각 자체가 함께 무너진 것 같았다.
동료도 없다.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나란히 서 있던 사람들, 함께 무언가를 만들어가던 사람들. 그런 관계 역시 더 이상 내 곁에 남아 있지 않다. 제자도 있었다. 가르치고 배우는 사이를 넘어 어떤 신뢰를 주고받았던 순간들이 분명 있었는데, 그 역시 좋지 않은 경험으로 끝났다. 관계는 끝날 수 있다. 그런데 어떤 관계는 끝나면서 나를 바꿔버린다. 다시는 같은 방식으로 사람을 대할 수 없게 만든다.
어떤 사람은 분명 친절하고 다정하다. 나를 불러 밥을 해 먹이고 선물도 준다.
호의는 분명 진심일 것이다. 짧은 시간을 내어 안부를 묻고, 작은 관심을 건네준다. 그 자체로 고마운 일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관계가 반갑기만 하지는 않다.
그 이유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시간의 문제인 것 같다.
그는 나를 위해 시간을 ‘내는’ 것이 아니라, 시간과 시간사이의 아주 짧은 시간을 ‘나누어 주는’ 느낌이다.
삶의 중심에서 나를 향해 오는 것이 아니라, 삶의 바깥에서 잠시 스쳐 지나가는 방식으로 나를 대한다.
그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관계는 원래 그렇게 이루어진다. 그러나 나는 그 방식이 낯설다.
나는 누군가의 ‘짜투리’가 되고 싶지 않은 것 같다.
짧은 시간이라도 괜찮다. 하지만 그 시간이 남아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해 선택된 시간이기를 바라는 마음. 그 차이는 생각보다 크다. 전자는 배려처럼 느껴지고, 후자는 관계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나는 고마우면서도 불편하다.
고맙다는 감정이 분명히 있는데, 그 감정 위에 어딘가 설명되지 않는 거부감이 겹쳐 있다. 차라리 이 관계를 하지 않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 생각을 하면서도 동시에, 그 짜투리 시간마저 사라지면 나는 완전히 혼자가 되는 것 아닌가 하는 불안이 스친다.
이 모순된 마음이 지금의 나를 설명하는 것 같다.
관계를 원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다. 나는 관계를 ‘제대로’ 원하고 있다. 어설픈 연결이 아니라, 서로의 시간을 조금은 내어주는 관계. 서로가 서로에게 등록되어 있다고 느낄 수 있는 관계.
아무나 곁에 둘 수 없게 되었고, 아무 방식으로도 관계를 이어갈 수 없게 되었다. 그것이 외로움으로 느껴지기도 하지만, 동시에 어떤 선택의 결과이기도 하다.
지금은 비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어쩌면 이 상태는 관계가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라, 다시 정의되기 전의 시간인지도 모른다. 누군가가 나를 짜투리가 아니라 온전한 시간으로 대할 수 있을 때, 그리고 나 역시 그렇게 할 수 있을 때, 그때 비로소 나는 다시 누군가와 연결될 수 있을 것이다.
마음보다 상황이 맞아야 관계가 이루어질 수 있다.
혼자 저녁을 먹고 혼자 영화관으로 향한다.
오늘 영화제목은 헤일 메리 내일도 모레도 영화가 나를 기다린다.
영화와 맺는 관계가 가장 깊은 것 같다.
나는 두시간동안 숨도 죽이고 눈도 떼지 않은 채 화면을 본다.
스크린이 이제 가장 가까운 관계가 되어버렸네. 아니 핸드폰도 있고 노트북도 있고 브런치도 있다.
참 오늘 하와이안 훌라 댄스에 등록했다.
그곳엔 몸 자체가 훌라스러운 노인들이 모여있다. 기본 70세 이상인거 같아서 67세인 나는 너무 일찍 왔나 싶기도 하다. 비용도 없고 시설도 좋고 점심도 준다. 목사님의 설교는 덤으로 듣는 수요일훌라댄스에 등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