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고 나쁜 영화의 기준은 무엇인가
좋은 영화라도 반드시 ‘좋다’고 느껴지지는 않는다. 뭐가 좋은건지 모르는 상태로 엔딩을 보았다.
<하워즈 엔드> 속 비스트라는 인물은 자기 처지에 맞지 않는 고상한 자리에 있지만, 별로 인연이라고 할 사람과 연결되지 않는다. 연결될 수도 없다. 이미 결혼한 상태이다.
마가릿은 현실적인 돈많은 사별남을 선택했고, 부인의 유언이 지켜지지 않은 것도 과도하게 부도덕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법적 구속력도 없고, 가족이 납득할 상속도 아니었으며, 부인은 거의 혼미한 상태에서 법적 효력이 없는 메모를 남겼다.
헬렌이 분노하는 장면도, 사실 비스트에 대한 호감이 바탕에 깔린 감정일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그리 지혜로와보이지도 않는다. 비스트가 그의 부인과 결혼한 것도 의리나 동정이 섞인 현실적 선택으로 보인다.
영화속의 사람들은 모두 현실적으로 움직이고 있다.
비스트를 죽게 만든 아들의 행동도, 그 시대적 관점에서는 그렇게 부당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돈 많고 힘있는 집의 아들이 비렁뱅이에 부도덕하다고 생각하는 비스트를 때리는 장면은
당시로서는 거의 상식적이기도 하다.
비스트는 거기에 갈 이유가 없었고, 결과적으로는 죽을 때가 되어서 단지 맞아 죽으려고 간 것뿐이다. 이건 좀 너무 심한 말이긴 하네.
그 시대 사람들은 그렇게 살았고, 지금도 세상에는 비슷하게 사는 사람들이 많다. 누가 직장을 잃었다고 해서 특별히 흥분할 일도 아니고, 그 사람만 직장을 잃은 것도 아니다. 단지 그 시대의 삶과 정서가 그렇다는 것뿐이다. 후세 사람들이 “부당하다”라고 표현하는 것은 당시의 현실과 맞지 않는다.
당시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 그게 영화의 역할이다.
사람들은 각자 자기 동력으로 움직인다. 서로 닿아야 하거나 결과가 있어야 한다는 건 억지다.
레너드가 <하워즈 엔드>에서 헬렌을 찾아가 맞아 죽는 장면은 이상하기조차 하다. 그는 유부남이고, 남녀의 일탈에서 책임질 수도, 책임질 일이 있는지조차도 몰랐다. 그럼에도 그는 그 자리를 찾아간다. 단지 그가 잠시 접해본 상류사회의 느낌을 찾아간 것일까?
레너드의 부인이 레너드에게 마지막으로 던진 질문, “너는 왜 나랑 결혼했느냐?”는 뼈아픈 질문이다.
더 이상 결혼생활이 가능하지 않은 지점에 이르렀을때 그 질문은 질문이 아닐 수 있다.
어쩌면 원망일지도 모른다. 너는 날 사랑하지도 않고 너가 원하는 삶도 아닌 거 같은데 왜 나와 결혼해서 나를 이렇게 힘든 삶을 살게 하느냐 라는 질문일지도 모른다. 질문같은 원망.
그들의 삶은 이미 끝났다.
이는 있는 자들도 없는 자들도 자신의 삶을 위해 움직이는 것 뿐임을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다.
영화는 도덕적 판단이나 교훈을 주려는 것이 아니다. 그저 다큐멘터리처럼 그 시대와 계층의 삶을 있는 그대로 보여줄 뿐이다.
상류층의 삶을 영화로 보여주는 이유는 무엇일까?
문화나 사회현상들이 가장 도드라지는 곳이 그들이기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층민들의 삶에는 문화랄 것도 선택이랄 것도 없이 절실하고 절규에 가까운 몸짓밖에 없기에 이야기로 만들 수 없을지도 모른다.
보는 즉시 너무 끔찍하고 아파서 사람들이 눈을 돌리게 되기 때문이다.
특별한 삶을 보여 주려는 것이 아니다. 부자든 가난하든, 삶의 구조와 인간의 움직임은 똑같다. 부자들 사이에도 소외와 갈망이 있고, 하층에서도 연대와 온기가 존재한다. 헬렌의 언니와 결혼 과정, 상류계층속에서의 하층민으로 전락하는 과정, 사생아를 낳는 상황 등은 계층 속 하층의 삶을 보여주는 장치일 뿐, 도덕적 비난을 의도하지 않는다.
인생은 막다른 길도 있고, 복구 가능성이 없는 삶도 있다. 그렇다고 외부에서 구조해주거나 교정할 이유는 없다. 인간의 삶은 본래 그렇게 움직이고, 가지 말아야 할 곳에도 가고, 하지 말아야 할 행동도 한다. 레너드의 헬렌 방문은 특별한 목적이 있는 행동이 아니라, 더이상 그 무엇도 할 수 없는 한 사람의 마지막 선택이자 행동일 뿐이다. 어쩌면 더이상 피할 수 없는 궁지에 몰린 한 사람이 살기위해 구조의 손길을 찾아간 장면일지도 모른다.
현실에서는 비스트의 아내가 밀콕스를 보고 자신을 어필하는 장면처럼 극단적 상황이 흔치 않다. 상류층의 모습과 몰락해 가는 집안의 모습은 다르다. 엄마와 아버지가 부재하고, 자매와 아들, 함께 사는 이모
노처녀가 된 자매, 언니의 후처 결혼까지, 모든 요소가 섞여 현실적인 계층 구조와 인간사를 보여준다.
영화는 과거 삶의 기록이자, 그 시대 사람들이 어떤 방식으로 움직였는지 보여주는 창이다. 교훈을 남기려 하지 않는다. 그저 “그때는 그랬다”라는 기록, 추억, 그리고 당시의 현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영화가 나에게 무엇을 남겼는지 아직 모른다.
헬렌이 비스트와 입마추고 보트가 자연스럽게 숲속으로 사라지는 장면.
거기서 남녀사이에 일어났을 일.
헬렌은 독일로 떠나 소식을 끊고 배가 부른 상태에서 자기의 책을 가지러 집으로 돌아오는 장면.
가족과 만나고 그 보호속으로 들어가 애를 낳고 살아가는 모습.
이 장면이 나는 불편했다.
마치 자기 주도적인 삶을 사는 것 처럼 행동하면서 결국엔 가족에게 돌아오기 위한 빌미로 책을 이야기 하고
그곳에 정주하는 삶.
그 시대에 미혼모가 가족 없이 애를 키우는 것은 불가능했겠지. 지금도 쉽지 않은 일이다.
바람직한 가족의 연대를 보여주는 장면이 나에겐 짜증스러웠다.
헬렌의 모습은 당당해 보이지만 그 당당함 속은 의지처가 필요한 미혼모의 허세일 뿐이라고 여겨져서이다.
나는 당당하지도 않고 허세도 없었지만 의지처가 없는 내 자신을 떠올리며 불편했다.
부러움은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 감정이다.
그냥 쟤는 참 좋겠다. 하고 부러워해도 되는데 그것을 미워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은
나의 결핍을 감당할 수 없어서일까?
내 마음 속 깊이 박힌 의지할 곳 없음의 고독함과 외로움.
나에게도 의지할 곳이 있다면 헬렌의 그 모습이 그렇게 비위상할 이유는 없지 않을까?
없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없음을 알게 하는 있음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지금 나에게 없는 것은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