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4

나는 없는 삶

by 정오의 햇빛

나는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다는 생각을 지금 처음 한 것은 아니다.

그 생각은 어떤 감정도 없이 그냥 하나의 사실처럼 존재해왔다.

부정할 필요도 없고 슬퍼할 필요도 없는 그냥 그렇다고 알고 있는 기정사실.


하지만 그 사실이 마음으로 느껴진 적은 없었다.

만약 그것이 마음까지 내려온다면 얼마나 슬플까.

나는 그 슬픔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느끼지 않고 인지의 상태로만 그 생각을 붙들어 두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처음으로 그 생각이 느낌으로 내려오는 순간을 마주하고 있다.


그건 “나는 태어나지 말았어야 한다”는 느낌이 아니라 “그걸 느끼면 얼마나 슬플까”라는 감각이다.

너무 슬플 것이다.

그걸 어떻게 견디고 어떻게 계속 살아갈 수 있을까.

어쩌면 그건 어떤 기억을 지우고 살아가는 사람과 비슷한 방식일지도 모른다.


수많은 자극이 들어와도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흘려보내는 삶.

받아들일 수 없거나 받아들이지 않기로 결정한 채 내부에 쌓아두고 정리되지 않은 것들과 함께

살아가는 삶.


그런데 그 생각은 사실 내 것이 아니었다.

“나는 태어나지 말았어야 한다”는 말은 그들의 입장에서의 말이었다.

그들에게는 그럴 수 있다.


하지만 나에게는 이유가 없다.

나는 그들의 삶을 유지하기 위해 존재하는 사람이 아니니까.

그럼에도 나는 평생을 그들의 입장으로 살아왔다.

내 입장에서 살아본 적이 없다.

만약 내 입장에서 살았다면 나는 훨씬 더 일찍 그들과 관계를 끊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끊지 못했고 어느 날 그냥 끊어졌다.


그래서 결국 나는 나로 살아본 적이 없는 사람이 되었다.

어릴 때는 그들의 입장으로 살았고 결혼 후에는 남편의 입장으로 살았고

아이를 낳은 후에는 아이들의 입장을 받쳐주는 역할로 살았다.

그리고 지금 나는 어느 누구의 입장도 아니다.


그래서 비어 있다.

이 공허함은 남의 입장으로만 살던 사람이 남이 사라진 자리에 혼자 서 있는 상태다.

남은 이제 없는데 나도 없다.

그런데 나는 나를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 모른다.

그냥 여기 저기 흩어진 채로 존재하고 있다.


살고 있지만 “나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의 삶.

나는 생각하지 않는 사람도 아니었고 바보도 아니었던 것 같은데 이렇게 나 없는 삶을 당연하게 살아왔을까.


처음부터 나를 만들어내지 못했던 사람인지도 모른다.

나를 주장하지 못했고 내 감정과 욕망을 선명하게 말하거나 써본 적이 없었다.

그저 어떤 흐릿한 느낌 속에서 살아왔다.

그럼에도 내 삶이 완전히 나쁘지 않았던 것은 어쩌면 나로 살지 않고 “역할”로 살았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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