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태어났을까는 말하자 마자 사라져버렸다.
마주함을 당하기 전에 나는 어떤 감정을 피하고 싶어 한다.
공허함, 쓸쓸함, 허무함, 외로움. 이 감정들은 빠르게 타오르고 사라지는 종류가 아니다.
바닥에 깔려서, 조용히, 오래 머문다.
그래서 더 지친다.
나는 그 감정을 없애려고 했다.
피하려고 했다.
정신을 여기저기 흩뿌리며 어지럽게 살아보기도 했다.
그런데 잠잠해지는 순간이 오면 어김없이 올라온다.
피한다고 사라지지 않는 감정들.
나는 알고 있다.
언젠가는, 피할 수 없는 시간이 온다는 걸.
내 몸을 내 뜻대로 움직일 수 없어서 도망칠 수도, 흩어질 수도 없는 그때.
그때의 나는 감정을 마주하는 게 아니라 그저 마주함을 당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생각한다.
조금 더 빨리 마주할 수는 없을까. 당하기 전에, 내가 먼저 앉아볼 수는 없을까.
우리는 종종 “늦었다”고 생각한다.
지금 마주하면 너무 늦은 것 같다고. 하지만 감정에는 ‘늦음’이라는 시간이 없다.
미뤄둘수록 커지는 것이 아니라, 그저 계속 그 자리에 남아 있을 뿐이다.
그래서 늦게 마주한다는 건 폭발하는 일이 아니라 이미 오래 함께 있었던 것을
뒤늦게 알아차리는 일에 가깝다.
나는 이제 조금 다른 방식으로 생각해보려고 한다.
감정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보내는 것이 아니라 그저 같이 있는 것.
공허함이 올라오면 “아, 또 왔네” 하고 이름을 붙여본다.
몸 어디에 머무는지 느껴본다. 가슴인지, 배인지, 목인지.
그리고 아무것도 해결하지 않은 채 잠깐 같이 있어본다.
이건 거창한 일이 아니다. 그저 도망치지 않는 연습이다.
그자리에 가만히 있어야 한다.
나는 한 번, 어느 날 밤 피어난 수선화를 보고 문득 웃었던 적이 있다.
그 순간은 모든 감정이 사라진 뒤에 온 것이 아니었다.
공허함이 없어서 웃은 것이 아니라 그 감정이 있어도 다른 장면이 같이 들어온 순간이었다.
아마 내가 바라는 삶은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공허함이 없는 삶이 아니라 공허함이 와도 어느 날 밤 예기치 않게 피어난 수선화를 보고
조용히 웃을 수 있는 삶.
마주함을 당하기 전에 나는 오늘도 조금 먼저 앉아본다.
도망치지 않고, 서둘러 보내려 하지도 않고,
그저
지나가는 감정 옆에 잠깐 같이 앉아보기로 한다.
이렇게까지 썼어도 여전히 가만히 있는 일이 쉽지 않다.
유튜브로 도망가면 아무 것도 마주 하지 않아도 된다.
글쓰기도 도망이다. 하지만 아주 멀리 도망가지는 않는다. 이렇게 문장으로 만나고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