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는 고사하고 불평만 멈춰도 대단한 일.
감사라는 감정이 어떻게 오는지, 왜 오는지, 나는 다시 들여다보고 있다.
다시 보는 행동은 익숙하다고 생각했던 것들—나는 그것들을 의심 없이 받아들였던 것들—을 다시 보고 있는 것이다.
정말 감사가 느껴진 적이 있었다. 어느 겨울, 남산 둘레길을 걸었던 날이다. 눈이 세 시간 동안 쉬지 않고 내렸다. 나는 그 눈 속을 세 시간 동안 걸었다. 춥지 않았다. 검은 하늘에서 쏟아지는 하얀 눈은 아름다웠다. 길은 인적이 드물었고, 산 아래 도시의 불빛이 눈을 맞으며 반짝였다. 혼자 걷는 그 순간의 느낌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 좋았다.
‘좋다’라는 감정이 세 시간가량 이어지자, 그것은 단순한 즐거움에서 멈추지 않았다. 좋다가 계속 넘쳐서, 좋다가 좋다에서 끝나지 않고, 결국 “아, 너무 고맙다”는 마음으로 흘러갔다.
그때 나는 생각했다. 아, 좋다는 명상을 몇 시간쯤 지속해야 이런 경지에 도달하는구나.
뇌가 판단의 영역을 벗어나는구나.
즉, 같은 상태로 지속적으로 감정을 경험하면, 결국 ‘감사’라는 자리까지 도달하는구나. 그것은 계산이나 의도와는 무관하게, 마음이 충분히 머무르는 시간에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감정이었다.
짧은 쾌감은 ‘좋다’로 그치지만, 지속되는 좋다는 충만함으로 넘쳐 지극한 감사의 마음으로 남는다.
감사는 어떤 이유나 유익 때문이 아니라, 깊은 상태에서, 나라는 존재가 사라지고 느낌이 전체를 채우는 순간에서 나온다. 좋다라는 감정이 넘쳐날 때, 자연스럽게 감사가 느껴진다.
누구에게 감사해야 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대상은 없었다. 그저 그 시간, 그 공간을 지나가는 나, 그 순간 자체가 너무 감사했다. 눈이 내리는 이 순간, 이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상태, 눈을 만들어 뿌리신 이가 하나님이라면, “어휴, 하나님, 이렇게 눈을 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하고 고백할 수밖에 없다. 그 마음은 순간순간 스며드는 감탄과 경이로움이었다.
조용한 산속, 홀로 걷는 순간 자체에 대한 감사였다. 시공간과 존재에 대한 감사였다.
그 이후로는 특별히 감사하다는 기억은 없었다.
감사까지는 가지 않고 ‘다행이다’ 싶은 정도였다.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도, 수술을 받은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불행하다거나 고통스럽다는 감정은 없었다. 마찬가지로 수술 후에도 살았다라는 느낌보다는 그저 마음을 쓰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라는 사실이 안도감을 주었다.
죽음 자체는 기존의 사실이므로 크게 다르게 느껴지지 않았다. 간절히 살고 싶은데 살아나게 된 것도 아니었다. 방사선 치료나 항암치료를 받지 않아도 된다는 점도 감사라기보다는 단순히 ‘다행이다’ 싶은 마음이었다.
사실 그 치료들을 하라는 권유가 있어도, 나는 처음부터 안 하겠다는 마음을 먹고 있었다.
실제로 해야 하는 상황이 닥쳤다면 어찌했을지는 알 수 없다.
나는 상식으로 본다면 감사가 넘쳐야 하는 상태인데 여전히 감사가 낯선 인간임을 깨닫는다.
주어진 목숨 그대로 살아가는 삶이다.
교통사고나 병으로 죽은 삶이 부족하거나 애통한 삶이라는 생각도 역시 없다.
각자의 삶일 뿐이다.
어느 집에 태어날 지 모르고 태어나는 것 처럼 어느 순간 어떻게 죽는지 모르는 것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