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에 대한 의문

의심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의문

by 정오의 햇빛

나는 요즘 처음으로 목사의 말을 생각해본다.
이전까지는 그냥 ‘그렇다나 보다, 저렇다나 보다’ 하는 정도였다.
수동적으로 듣는 수준, 믿지도 의심하지도 않고 흐르게 두는 상태였다.

그런데 요즘 처음으로 부딪히고 있다.
교회에서는 예수가 우리의 죄를 대신해 죽었고, 그래서 우리는 구원받았다고 가르친다.
그 때문에 예수의 대속과 죽음에 감사하고 기념해야 한다고도 했다.
나는 평생 그렇게 들어왔다.

하지만 지금, 나는 처음으로 물음표를 갖는다.
예수가 대속해서 죽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렇게 전해졌으니까.
하지만 “감사해야 한다”는 것은 알 수 없다.
나는 내가 죄를 지은지도 모르고, 예수가 나를 위해 죽어 영원한 생명을 주었다는 사실도 알 수 없다.
그런데 감사해야 한다니, 이해되지 않는다.

조금 더 나아가면, 굳이 예수를 보내고 목숨을 거두어 인류를 구원하는 과정이 꼭 필요한 걸까, 하는 생각도 든다.
죄를 사할 수 있는 존재가 있다면, 그 존재는 그런 과정이 있어야만 가능했던 걸까?

왜 그랬느냐고 물으면, 아마 답은 이렇게 나오겠지.
“하나님은 공의로운 존재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셨다.”
공의로워서 죄를 물어야 했고, 공의롭기에 그 과정을 거쳐야 죄를 사할 수 있었다고.
그런데 하나님의 작동 원리가 너무 인간적인 건가.
혹은 인간의 작동 방식이 하나님과 닮은 걸까.

어제 문자매를 따라 왕국회관 성만찬을 경험하면서, 이 의문은 더 깊어졌다.
포도주 잔과 빵 접시가 앞으로 지나갔지만, 아무도 그것을 먹지 않았다.
전해진 말에 따르면, 그것을 먹을 수 있는 사람은 하늘에 소망이 있는 14만 4천 명뿐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나머지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예수가 우리의 죄를 대속해 주었고, 우리는 구원받았다면서, 실제로 구원을 얻는 사람은 극소수라는 말 아닌가.

그럼 나는 무엇을 감사해야 하는가.
나는 아직 그 14만 4천 명에 속하지도 않았는데, 왜 감사해야 하는가.
한 번도 의심해 본 적 없이, ‘그들이 그렇다면 그렇다네, 저렇다면 저렇다네’ 하며 살아왔지만, 지금은 처음으로 이렇게 묻는다.
“아니, 왜 감사해야 하는 거지?”

감사할 수도 있다.
하지만 감사해야 하는 일인지는 잘 모르겠다.
이 갑작스러운 의문은 어이없으면서도, 마치 알지도 못하는 백억의 빚을 대신 갚아주었다는 이야기를 듣는 기분이다.
그 빚은 누가 진 것이며, 나는 왜 책임져야 하는가?
예수는 왜 그 책임을 져야 하는가?

이 느낌은 부모에게로도 이어진다.

부모님에게 감사하는 것도 당연하다고 여겼지만, 이번에는 다르다.
그들의 노력 때문에 감사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단지 ‘낳아줘서’라는 이유였다.
솔직히 나는 낳아 달라고 요청한 적이 없고, 부모도 나를 계획적으로 낳으려 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저 낳아 보니 내가 태어났을 뿐이다.

그럼에도 감사해야 할까.
그들이 나를 먹이고 입히고 키운 일은 감사할 만한 일이긴 하지만, 내가 원한 방식이나 원하는 만큼의 방식은 아니었다.
내가 바랐던 기대와 필요와 일치한 적도 거의 없었다.
그럼에도 마음속에서 습관처럼, 본능처럼 ‘감사해야 한다’는 생각이 올라온다.

세상 사람들은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깜짝 놀랄 것이다.
‘감사를 모르는 인간’이라고 판단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내가 감사를 모르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지금, 처음으로 예수에게도 부모에게도 감사해야 할 이유나 명분을 스스로 찾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마치 꿈속에서 듣던 이야기가 갑자기 현실 속에서 생경하게 튀어나온 느낌이다.
처음으로 예수를 만나고, 처음으로 감사해야 할 이유를 묻고, 처음으로 내가 태어난 일의 의미를 묻는 순간이다.


나는 감사할 수 없다거나 감사하기 싫다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과거에도 감사했고 앞으로도 감사하겠지만 왜 감사해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이다.

이유를 모르는 채 감사했던 날들이 이제 이유를 알고 감사하는 날들로 바뀌려나?

한가해서 이런 생각을 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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