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동화)함께 사는 세상, 관대한 세상을 꿈꾸며
나는 힘이 들었다. 사실 숨이 턱턱막히고 목이 마른건 한참 전부터였다.
하지만 앞서 걷는 엄마의 모습을 보면 힘들다는 투정이 나오질 않았다. 엄마의 손은 언니를 놓치지 않으려고 힘이 잔뜩 들어 간 채 언니 손을 꼭 잡고 있다.
엄마의 등은 오래전부터 젖어 있었다.
나는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꾹 참았다.
내가 왜 같은 길을 한 달 째 걷고 있는지 억울해서도 아니다. 언니가 떼를 쓰다 내 물까지 다 쏟아 버려서도 아니다.
엄마는 내게 산에 오르기전 늘 신신당부를 한다
"니 언니 뒤에 딱 붙어 걸으라. 언제든 아래로 뛰어 갈것 같음 니가 먼저 잡아야한다. 놓치면. 니언니 잃어버리면. 엄마도 너도 못산다.
엄마말 무슨말인지 알겠지!"
"응."
나는 언니 뒷모습만 보면 된다.
언니가 뒤를 돌아보면 앞을 보고 걸으라고 말해준다.
언니는 몇번을 주저 앉고 엄마는 일으켜 세운다.
언니는 그만 가지 않겠다고 떼쓰기를 수십 번 .
그러다 중간 휴게지점인 매점이 작은 점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민정아 어제보다 많이 왔지?"
"그럼. 훨씬 더 왔지!"
"조금만 쉬었다 내려가자."
"엄마 언니 내려갈 땐 내가 손잡고 내려갈까?"
"아니다. 엄마가 데리고 갈게. 니 무슨 힘이 있나."
"아냐. 오늘은 내가 같이 손잡고 내려 갈게. 엄마가 앞서 걸음 되지. 물 좀 사올까?"
"그래라. 물도 사고 언니 좋아하는 초콜렛도 하나 사와라."
멀리서 보니 주저 앉은 언니는 두 손으로 내내 땅을 파고 발로 걷어 차기를 반복한다.
얼굴까지 흙투성이인 언니를 닦아내느라 엄마 손이 바삐 움직인다.
나와 두 살터울인 언니는 내가 기억하는 언니의 처음 모습부터 늘 그랬다. 내가 밥을 먹을 나이에도 스스로 밥을 먹지 못했고 내가 말을 하고 걸을때도 언니는 잘 걷지 못했다. 언니가 걷기 시작하면서부터 엄마는 한시도 눈을 뗄 수 없었다. 우리 가족은 여행 한 번, 영화 한편 보지 못했고 외식은 꿈도 꿀 수 없었다. 지난 할아버지의 장례식에서도 언니를 맡길 곳이 없어 언니의 학교선생님에게 부탁해야했다.
언니는 자폐였다.
말을 할 수 있어도 자신의 생각을 얘기하지 못하고, 볼 수 있어도 보고 싶은 것만 보며,
다른 사람의 마음이나 감정은 알 수 없는.
엄마 아빠는 언니가 아프다는 것을 알고 한순간도 마음편히 지낸적이 없다고 했다.
"물물물!!"
"그래. 언니! 줄게줄게. 잠시만.
천천히. 언니 천천히 빨대로. 옳지. 언니 잘했다."
"초.콜.렛 주.세.요. 초.콜.렛 .주.세.요. !!!"
마음급한 언니가 내 손안의 초콜렛을 보더니 방방뛰기 시작한다.
"언니! 내가 초콜렛을 줄건데 내 손잡고 잘내려가면 내려가서 내가 초콜렛 하나 더 줄거야.
언니 손 더러우니 내가 해줄게. 잠깐 기다려봐봐."
껍질을 벗겨내고 초콜렛을 입에 넣어주니 언니가 그제야 웃는다.
나는 학교에 다니기 시작하면서부터 언니의 보호자가 되어야했다. 어느 친구들은 그런 언니와 동생인 나를 놀렸고, 어느 친구들은 불쌍해했다. 나는 놀림을 받는 것도, 불쌍한 대접을 받는 것도 싫어 전학을 가고 싶다고 떼를 쓰기도 했고 언니가 더 많이 아파서 학교에 못가게 되었으면 하고 바라기도 했다.
하지만 언니가 학교에 못가는 날이면 밤에 일하는 엄마는 낮에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그래서 정작 그런날이 와도 언니가 학교에 오지 않은 기쁨보다 잠을 자지 못한 지친 엄마를 보는 슬픔이 더 컸다.
우리 집은 부유하지 않았다. 엄마는 아픈 언니를 두고도 일을 해야만 했다. 결국 언니가 자는 밤시간에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했고 엄마는 24시간 문을 여는 김밥집에서 밤부터 아침까지 김밥을 마는 일을 했다. 그리고 언니와 내가 학교에 가는 시간에 언니를 학교에 데려다 주고 나서야 잠을 잤다. 아빠가 퇴근해서 들어오면 엄마는 우리를 아빠에게 맡기고 식당으로 출근을 하는 것이다.
얼마 후 엄마는 내 소원대로 언니를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전학시켰다. 학생수는 몇 명이고 학교 분위기는 어떤지 엄마는 많은 고민끝에 걸어서 30여분 떨어진 학교로 결정하게 되었다.
버스로 10분도 채 걸리지 않는거리지만 엄마는 언니를 버스에 태워 데려다주고 돌아올 때는 30분을 걸어서 오곤했다. 그리고 다시 걸어서 언니를 데리러 가고 언니와 함께 버스를 타고 집으로 왔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엄마가 혼자였을 때 버스를 타지 않은 것은 순전히 하루 버스비를 아끼고자 한 엄마의 수고였다.
언젠가 엄마친구가 왜 힘들게 버스를 타지 않고 걸어다니느냐고 물었을 때 그 돈이면 민희 좋아하는 간식 하나를 더 살 수 있고 두 다리 튼튼한 나는 하나도 힘들지 않다고 말했다.
엄마는 혼자 돌아오는 길, 혼자 다시 데리러 가는 길의 버스비가 아까웠던 것이다.
문 뒤에 서서 그 얘기를 들은 나는 새필통이 갖고싶어 일부러 망가뜨렸던 내가 원망스러 이불을 뒤집어 쓰고 울었다.
오늘 언니는 내 손을 꼭잡고, 다른 곳으로 도망치지도 않고 올라온 그 산을 되돌아 잘 내려왔다.
이제는 한 발 딛고나면 또 다른 발이 있어 딛고 딛고 또 딛으면 원하는곳에 도착한다는 것을 언니도 알 것이다.
오를 때는 숨이 차고 다리의 앞쪽이 아프지만
내려올 때는 몸을 뒤로 젖히며 조심히 내려와야 넘어지지 않는다는 것도 차차 알게 될 것이다.
엄마는 언니가 다른 사람만큼, 또는 더 높이, 더 멀리 뛰기를 바라지 않는다고 했다.
그저 건강하게 엄마랑 같이 엄마옆에서 함께 사는 것. 그리고 엄마와 함께 이 세상을 떠나는 것.
엄마엄마 엄마의 소원이지만
그 말은 슬프다.
"자신은 없지만 나도 언니 손잡고 오늘 내려 온 것처럼 천천히 해볼게. 백번 천번 연습해야되면 그렇게도 해볼게."
엄마의 등을 보고 슬펐던 이유가 이제 생각이 났다.
언니의 모든 것이 엄마의 탓인것 마냥 엄마 혼자 짊어지고 가려는 그 모습에 울컥했던 거였다.
우리 같이 걷자. 언니도 엄마도 아빠도.
우린 가족이니까.
좀 힘들어도 서로서로 어깨가 되고, 손이되고, 다리가 되어주며.
한 가지가 있어도 열 가지가 부족한 사람이 있다.
한 가지 이상 뛰어난 것이 있지만 수십 가지 부족한 점들에 가려 쉬 보이지 않는다.
계산에 빠르지 않고 겉과 속이 다를 수도 없다.
이해력이 늦거나 마음읽기가 어려워 어떤 형태로든 세상과의 소통이 어려운 사람.
사람들은 흔히 그들을 장애인이라고 부른다.
때때로 장애때문에 그 가족이 힘든 것은 아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 보는
불편한 시선들이,
내 자식과 같은 반이 되지 않았으면
짝이 되지 않았으면 하는 이기적인 마음들이,
우리 동네에 그 아이 수근거리는 말들이
그들을 아프게 한다.
함께 사는 세상, 관대한 세상을 꿈꾸며.
제가 알고 있는 가족의 이야기를 각색하여 이 글을 썼습니다. 용기있게, 최선을 다해서 살아가고 있는 많은 장애인 가족들의 마음에 작은 위안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