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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sa J Aug 31. 2017

기적을 쓰고 싶었던 어느 해. 2013.

덥고 습한 계절이 오면 어김없이 생각나는 4년전 그해. 여름 가로질러 여름, 또 여름이었던.

잃어버린 가을을 그리워하고 힘들었던.

하지만 더운 여름날 한복판에 서면 늘 생각이 나는 그 곳의 이야기를 이제 다시 꺼내어 쓴다.




한국 필리핀 교사 교환프로그램으로  떠났던 4개월의 여정이었다. 그 4개월을 위해 내려놓고 포기해야 할 것들이 많았지만 삶에 있어 흔치 않을 기회들을 놓치고 싶지 않았기에 설득과 호소를 반복하며 얻어낸 시간들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모험은 시작되었다.


어느 지역에, 어느 학교에, 어느 환경에 놓일지는 누구도 알 수 없었다. 필리핀 정부의 사정은 자주 바뀌었고 출국일자도 연기에 연기를 거듭하며 8월 어느날 드디어 출국길에 오른다.


한국에서 1주, 필리핀에서 2주의 교육시간을 거쳐 각자 가야 할 학교를 배정받던 날.

필리핀 지도를 펼쳐들고 하나하나 짚으며 확인하던 떨리는 그 날의 기억은 여전하다. 함께 했던 동료들과 뿔뿔이 흩어져 배정되던 날, 교육받았던 클락에서 가깝고 멀고에 따라 탄식과 함성이 교차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나는 필리핀의 북쪽 누에바시티의 어느 작은 시골마을에 배치받게 된다. 게다가 우리중 가장 북쪽으로 가게 된 것이다!

Nueva Ecija에 있는 Science City Of Munoz


지명은 Science city였지만 넓게 평야가 펼쳐진 농업이 주를 이루는 가난한 시골마을이었다. 필리핀에서 가장많다는 그 흔한 졸리비가 없는 유일한 곳일지도 모른다.


가도 가도 끝이 없을것 같던 길을 가고 또 가고 거의 지쳐갈무렵의 늦은밤, 첫 홈스테이 집에 도착했다.


그리고 다음날, 우리 학교 Munoz north school.



첫발을 내딛었던 9월은 필리핀의 우기로 하루 한 번이상은 꼭 비가 내렸다. 뜨거운 햇빛과 습한기운. 날씨만으로도 힘든 시작이었지만 무엇인가에 이끌린듯 설레었고 비장한 각오를 다졌다.


그렇게 대면한 첫날.

아침조회 및 체조시간

낡은 교문앞부터 늘어서있던 아이들. 호기심많은 아이들의 똘망똘망한 눈빛과 하나하나 눈이 마주칠마다 가슴이 쿵쾅거렸다. 운동장이 없는 이 학교에서 시멘트바닥의 중앙 홀은 아침체조, 체육활동, 놀이 등 모든 액티비티가 이루어지는 일종의 다목적공간이다. 많은 아이들에 비해 턱없이 좁은 공간이었지만 7시반부터 모인 아이들의 열정이 대단하다. 이 날 교장선생님은 아이들에게 나를 소개해주었다. 낯선땅에서 온 첫 외국인을 본 아이들의 느낌은 어땠을까. 아이들은 나와 마주칠때마다 손을 흔들었고 활짝 웃어주었다.

그것만으로도 행복했던건 여러가지 환경으로 힘들었던 그 때의 상황에서 내가 갖는 작은 위안의 시작이었기 때문이다.  벌레 공포증이 있는 나는 매미만한 바퀴벌레, 난생 처음 보는 크고 작은 도마뱀들, 정체를 알 수 없는 길고 짧은 벌레들이 침대밑에서, 방안의 곳곳에서도 마음껏 오고 가는 환경에 익숙치 않았다. 아니, 숨을 쉴 수 없을 만큼 무서웠고, 때때로 그 공포로 잠을 이루지 못한 채 울었고, 어느 때든 포기하고 싶었다. 음식은 맞지 않았고 외국인을 처음보는 사람들의 시선, 언제나 현지인처럼 옷을 입고 단단히 가방을 붙들어 매고 치안을 걱정해아했던 것도 힘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도, 나와 함께했던 이 꼬맹이들에게도 우리의 만남이 서로에게 작은 기적을 쓰게 했다고 말하고 싶다.




도대체 장애아이들을 어떻게 가르친다는 거지?



앞으로 내가 쓸 교실이라며 안내받은 곳에서 22명의 장애아이들과 그 부모들을 만났다. 각오를 하고 또 했지만 혼자서, 그것도 언어가 통하지 않는 아이들을 22명을 가르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게다가 아이들은 이 학교의 학생들이 아니었다!

이 도시에 있는 모든 장애 아이들이 한국에서 온 특수교사가 어떻게 가르치는지 궁금했던 것이다. 이 도시의 어느 학교에도 특수학급이나 특수교사가 없고 아이들은 어떤 개별적인 지도도 받지 못했다고 했다. 장애도 나이도 사는 마을도 제 각각인 아이들을 분류해서 요일별로 나오도록 해야한다고 제안했다. 한 아이가 수업을 받을때 다른 아이들은 기다려야하므로 시간대별로 정해서 오는것이 좋겠다고 말이다.

하지만 이 모든것이 기우였음을 하루, 이틀이 지나며 깨닫게 되었다. 대부분의 가정은 형편이 어려웠고 매일 타고 올 차비도 보호자가 함께 오가며 교육을 꾸준히 받을 수 있는 열정도 없었다. 결국 시간이 지나면서 오지 않는 아이들이 더 많았고 기억에 남는 4명의 아이만 꾸준히 만나게 되었다.




불가능은 없다!


해당학교에 배치되고 첫 출근을 하기 까지 내가 특수교육을 해야하는지 한국문화수업을 해야하는지 모를 정도로 정보를 제공받지 못했다. 한국에서 준비해간 많은 한국문화자료들이 무용지물이었다. 당장에 수업에 쓸 장애아이들을 위한 낱말카드, 강화물 , 수세기판, 색연필과 준비물들이 필요했고  몇가지 한국에서 택배로 받기도 했다.

그리고, 생각보다 유용했다.


청각장애 아이. 말은 하지 못했지만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하고 수매칭도 잘했던 예쁜 아이다.

필리핀은 영어가 모국어인 나라가 아니다. 따갈로그어라는 그들만의 언어를 사용한다. 어느 누구도 필리핀 사람끼리 영어로 대화하지 않는다. 그들도 학교에서 영어를 배우고, 학교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은 영어가 서투르거나 전혀 모르기도 한다. 자신의 모국어도 어려운 장애 아이들이 영어를 할리 없고, 부모도 영어를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 협력교사의 영어 통역이 필요했다. 몇가지 유용한 따갈로그어를 배워 수업에 활용했고 물론 낱말도 따갈로그어로 가르쳤다. 다행히 알파벳이 근간인 언어라 한정된 단어를 가르치는 일은 금방 익숙해졌다.




사랑하는 엄마, 사랑하는 존



특히 존의 상황은 학교에서 일하는 내내 너무 안타까웠다.

존은 지금껏 음식을 씹어서 먹은 적이 없다고 했다. 입구조의 문제로 액체만 흘려 먹일 수 있으며 입술이 다물어지지 않고 침조차 삼키지 못해 늘 수건을 목에 걸고 있다. 언어는 당연히 할 수 없는 상황. 편마비로 한쪽 팔과 다리에 힘이 없어 잘 걷기도 힘든 존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웃는 얼굴이었다. 처음으로 이름카드를 완성하고 해맑게 웃던 아이. 한국에서 무료로 수술해 줄 사람을 찾아보겠다고 했지만 약속은 지키지 못했다. 절차가 복잡하고 선뜻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괜한 기대만 심어준 것 같아 얼마나 미안하던지.

살면서 하루라도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다면, 두 다리로 뛰고, 엄마라고 말을 하고, 입을 다물고 잠을잘 수 있다면... 존이 지금쯤 아주 좋은 복지가를 만나 그런 시간들을 누리고 있다면 좋겠다. 그래서 10년도 넘게 그런 아들곁에서 한시도 떨어진 적이 없는 어머니의 슬픔이 그만 멈추었으면 좋겠다.




기적을 쓰다


어떤 사람은 좋은곳에서 살고
어떤 사람은 비를 채 피하기도 힘든곳에서 살며

어떤이들은 깨끗한 음식을 배불리 먹고
어떤이들은 남이 버린 음식으로조차 주린 배를 채우지 못하며

누군가는 이것이 그들 나름의 능력이라고도 하고
누군가는 게으름 탓이라고도 하지만

어떤 아이에게 꿈이 있고
어떤아이에게 꿈이 없는 것이

그 덕분과
그 탓이라고 할 수 있을까

꿈을 품었던들 그게 그 아이의 능력과 노력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을 이 나라에서.

때때로 그 풍경이 슬프고
동정과 연민이 들면서
때때로 작은 불편함도 참지 못하는
나는

세상의 모든 양면이 그러하듯.
나는 정말 몹쓸 이성과
대책없는 감성을 가진것 같음.

오늘 지프니와 트라이시클을 환승해가며 드는 생각.                                         - 2013. 11. 8.


이 날의 일기가 대변하듯 빈부차이가 심하고 가난한 나라, 그리고 그 가난을 해결할 대안도 교육도 부족한 나라에서 어려운 사람들을 지켜보는 일은 지독히도 가슴아팠다.

트라이시클(오토바이를 개조한 교통수단)을 타고 집으로 돌아갈 때마다 창문없는 트라이시클 밖으로 여러 세상이 보인다. 다 쓰러져가는 오두막 집에서 이를 잡고있는 아이. 구걸하는 아이. 헤지고 더러워 더는 입기 힘들것 같은 옷을 겨우 걸치고만 있는 아이. 맨발인 아이...

어느날부터인지 나는 트라이시클을 타고 학교를 오가는것이 얼마나 사치인가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지프니를 타고 환승하면 얼마를 더 아낄수 있는지도. 지프니를 타며 나도, 함께 탄 사람들도 서로를 구경하듯 흘끔흘끔 쳐다본다.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뒷사람이 운적석쪽에 가까운 앞사람에게 차비를 전달하는 데 늘 정겹고 친절하다. 내가 불편할까봐 도와주고 맘써준 사람들이 정말 많았다. 나를 걱정해주고 기다려준 사람들, 점정 더 말라가는 나를 보고 좋아하는 과일을 사다주고 무엇이든 권하고 먹어주길 바랬던 그들의 고운 마음도 다시한번 마음깊이 새겨본다.


아주 작은 기적이었지만 그들의 보답은 뜨거웠다. 마지막 가는날 내 손을 꼭 잡아주었던 조나단의 할머니, 나를 안고 울음을 멈추지 못했던 존의 엄마, 여덟살 청각장애 딸로부터 처음으로 아빠라는 말을 들었다는 아빠의 감동.

비록 내가 있었던 시간은 너무 짧았지만 이것 하나만은 기억해주길 바래본다. 누구나 배울 권리가 있고, 좀 더 나은 삶을 살 권리가 있음을, 누군가의 귀한 딸, 뼈아픈 아들임을 잊지 않기를, 그래서 그들이 주어진 삶보다 더은 삶을 살 수 있음을 포기하지 않고 믿고 도와주기를.

그것이 내가 남긴 작은 기적이기를.

그리고 세상의 무엇도 혼자라서 두렵지 않고 어떠한 곳에서도 무슨일이 있어도 씩씩하게 살 수 있는 건강한 내가 되어

이렇게 기적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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