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 줄 알아도 안 하기
아침 7시. 깊은 잠에 빠진 아들을 깨우러 가기 전 세수를 하려고 화장실로 향했다. 화장실 전등 스위치를 눌러보았지만 불이 들어오지 않는다. 전기가 나갔나 싶어서 환풍기 스위치를 눌렀더니 '윙'하며 펜이 돌아가는 소리가 들린다. 전기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전구가 수명을 다 했나 보다.
'내가 전구를 갈까? 남편이 퇴근하면 갈아달라고 할까?'
잠시 고민을 했지만 뻔한 고민이었다. 늘 그랬듯 남편에게 부탁하기로 결론을 지었다. 결혼 8년 차 전구를 딱 한 번 갈아봤다. 전구도 여러 번 나갔을 텐데 딱 한 번 갈아본 경험에는 사연이 있다.
결혼 전 남편과 나는 장거리 연애를 했다. 결혼을 결심한 후, 주말 부부를 할까도 고민했지만 우리가 꿈꾸는 결혼생활과는 맞지가 않아서 내가 직장을 그만두고 남편이 출퇴근하기 좋은 쪽으로 이사를 왔다. 낯선 지역에서 지금과는 달리 경계심이 많은 나는 집안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보내다 보니 자연스레 집안일을 손에 잡히는 대로 하게 되었다. 결혼하고 6개월 동안 남편은 집에서 먹고, 쉬는 것을 제외하고는 집안일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못했다는 표현이 맞다. 하려고 해도 남편이 회사 간 사이에 내가 다 끝내 놓았다.
어느 날 안방의 전등이 나갔다. 남편이 퇴근하고 오려면 시간이 있어서 집에 있는 여분의 새 전구로 갈아 놓았다. 자취할 때는 같이 살던 언니가 전등을 갈았던 터라 익숙하지 않은 일을 하는 나 자신이 기특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퇴근하고 남편이 돌아오면 새 전구로 바꾼 것을 자랑해야지 마음먹었다.
"자기야, 내가 전구 갈았어. 잘했지?"
당연히 칭찬이 들려올 줄 알았다.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남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화가 난 것 같기도 하고 , 슬프기도 한 것 같은 애매한 표정이었다.
"잘했어. 그런데 나 할 말 있어. 자기가 날 위해서 집안일 미리 다 끝내 놓는 거 아는데, 내가 할 일도 남겨 주면 좋겠어. 나는 내가 우리 집에 고장 난 거 있으면 고치고, 쓰레기 버릴 거 있으면 같이 버리고, 같이 뭔가를 하고 싶어. 가끔은 내가 집에서 하숙하는 느낌이 들어."
'하숙'이라는 단어에 남편의 반응이 조금은 이해가 갔다. 함께 살아가기로 결정하고 함께 사는 집인데 손님 취급을 받는 느낌이라. 내가 남편 입장이었어도 마음이 썩 좋지는 않았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일이 있은 후부터 전구를 갈 거나 쓰레기를 버리는 일 등은 남편이 거의 도맡아 하고 있다.
결혼 생활을 하면서 느낀 바가 있다. 가끔은 할 줄 알아도 상대방에게 기회를 넘겨주어야 한다는 거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일을 넘겨버리면 싸움이 되니 이것도 강약 조절이 필요하다.
아들을 유치원에 보낸 후 남편에게 문자를 보냈다. 오늘 집에 와서 해야 할 임무는 전구 갈기입니다라고 말이다. 남편은 이모티콘까지 보내면서 OKAY를 날려준다. 남편이 오기 전까지 어둠 속에서 화장실을 써야 하지만 그 어둠이 곧 밝아질 것을 아니 무섭지 않다. 오늘은 전구였지만, 내 삶이 방향을 잃어서 깜깜해질 때 밝아질 거라는 기대가 늘 가까이에 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