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사, 생각을 복제하는 법

3. 슬기로운 취미생활

by 지금


자취생활을 갓 시작했을 때, 내 집이 생겼다는 기쁨에 친구들을 초대했다가 집에 온 친구들이 깜짝 놀란 일이 있었다. 바로 집안 곳곳에 커다란 글씨로 붙여놓은 내 메모들 때문이었는데, 나를 위해 써놓은 메모들을 친구들에게 들켰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벌거벗은 느낌이 들었다.


외모에 한창 관심이 많을 때에는 집안에 다이어트에 관한 문구가 대부분이었다. 냉장고 앞과 식탁 위에 마른 연예인들이나 다이어트 자극 문구를 붙여놓고 적게 먹고, 탄수화물을 줄이려고 노력했다. 식욕을 절제하기 위해서 경각심을 일으키는 문구들이 대부분이었다. 자극적인 문구들은 식욕을 떨어뜨리는 데에는 효과적이었지만 나를 주눅 들게 했다.


나에게 어울리는 옷 스타일, 헤어스타일을 찾는 것처럼 시간이 흐르면서 내가 좋아하는 글귀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공급과잉의 시대에 텍스트도 예외는 아니었다. 핸드폰으로, 컴퓨터로 텍스트들은 쉴 틈 없이 눈앞에 쏟아졌다. 눈으로 담는 것들은 내 생각의 뿌리가 되었다. 기왕이면 좋은 글을 눈에 담고 싶었다. 스쳐 지나가는 글 중에서 마음에 드는 문구들을 하나씩 적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마음에 들면 정갈한 글씨로 옮겨 적어서 집안 곳곳에 붙여놓고 오가며 눈에 담았다. 나중에 명상을 배우면서 알게 되었지만, 만트라 명상이라고 해서 자신에게 의미가 되는 특정한 단어나 문구를 반복해서 암송하는 것은 명상의 방법이기도 했다.


본격적으로 글을 쓰면서 배우고 싶은 스타일을 발견하면 필사 노트에 옮겨 적었다. 글을 읽을 때 단순한 문장의 내용뿐만 아니라 문체도 고려하게 되었다. 평범한 내용으로도 독자의 마음에 감동을 주는 따뜻한 글, 멋있게 쓰고 싶은 유혹을 내려놓고 약간은 투박할지언정 자연스럽고 담백한 말투, 상대방에게 부담감을 주지 않으면서도 빈틈없는 사고방식, 몰입하게 만드는 짜임새 있는 글의 구성을 발견하면 수집하는 마음으로 무작정 옮겨 적었다. 눈으로 읽으면서도 충분히 글을 감상했다고 생각했지만, 글 전체를 받아쓰기하듯 옮겨 쓰면 눈으로 읽으면서 느끼지 못했던 문장과 문장 사이의 간격과 생각의 속도가 느껴졌다. 작가의 사고방식이 내 머릿속에 복제되어서 다시 한번 재생되는 듯했다. 좋은 문장을 오랫동안 눈에 담고 손으로 꾹꾹 눌러쓰면 나도 곧 그렇게 글을 쓸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생겼다.


글을 쓰면서 글씨가 예뻐졌다. 손글씨보다 타이핑이 더 편했던 터라 볼펜으로 글을 적어가는 것이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펜이 종이에 닿는 감각과 펜이 굴러가는 느낌이 주는 특유의 향수가 좋았다.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글을 써 내려가면 글씨에도 정갈함이 묻어 나왔다. 집중을 못 하거나 대충 쓰면, 다 쓰고 나서 그 페이지도 못나고 미워 보였다. 어렸을 때 서예를 하면서 글자를 예쁘게 쓰는 연습을 했는데, 그때처럼 한 자 한 자를 정성스럽게 써 내려가면서 글이 내 깊숙한 곳 어딘가에 각인되기를 원했다. 내가 고른 텍스트에 집중하는 작업이었다.


좋은 글을 모아놓은 필사 노트는 내 보물창고였다. 지인에게 좋은 일이 생겨서 축하해주고 싶을 때, 혹은 주위 사람들이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을 때 어설픈 위로나 축하보다 글귀가 좋은 선물이 될 때가 많았다. 마음을 전하고 싶을 때 필사 노트를 뒤적거리다 손편지를 쓰기도 하고, 때론 마음에 드는 엽서나 그림의 뒷면에 옮겨 적어서 선물했다. 선물하려는 글귀를 옮겨 쓰면서 선물하는 상대방을 떠올리면 자연스레 선물에 정성이 더해졌다. 그렇게 준비한 글귀 선물은 어설픈 말 한마디, 혹은 근사한 선물보다 진심을 전하기 좋았다.


글을 옮겨 쓰면서 위로받았다. 일이 생각처럼 풀리지 않던 어느 날 저녁, 혹은 뜬구름 잡는 생각들로 머리가 복잡한 생각이 복잡할 때, 필사 노트는 거대한 위로문이었다. 좋아하는 글을 쓰면서 마음을 다잡거나, 쓴 글을 읽어보면 사진앨범처럼 처음 그 글귀를 발견했을 때가 떠올랐다.


추구하는 삶의 방향이 바뀌면서 집안의 문구들도 많이 바뀌었다. 다이어트, 말투, 인간관계, 스트레스 관리까지 광범위한 내용을 거친 끝에, 지금은 마음의 기본의 토대가 되는 글이나, 삶의 지향점을 적어놓은 문구들이 많다.


좋아하는 지인에게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은 공짜지만 두 번째로 좋은 것은 비싸다’라는 말을 들었다. 오랫동안 남는 건 물건보다 행위 그 자체인 것 같다. 필사를 꾸준히 하다 보면 필사 노트는 업데이트되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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