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슬기로운 취미생활
어렸을 때는 책을 좋아하지 않았다. 읽는 행위는 거의 항상 학습이라는 목적이 있어서 재미가 없었다. 나는 책과 거리가 먼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사회생활을 하고 스스로 답을 찾아야 하는 상황이 생기면서 읽을거리를 찾게 되었다. 누가 시켜서 읽는 게 아니라 끌리는 책을 읽으면서 책이 좋아졌다.
나는 종종 덕후 프로젝트를 한다. 살다 보면 삶이 화두를 던질 때가 있다. 평소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가도, 갑자기 어떤 것에 꽂히거나 무언가가 크게 다가올 때가 있는데, 그럴 때 프로젝트를 시작한다. 덕후처럼 하나를 집중적으로 판다. ‘쉽고 맛있는 집밥 요리법’ 같은 당장 끼니가 걸린 임박하고 중요한 문제부터 급하진 않지만 마음에 짐처럼 남아있는 ‘부모님과 짜증 내지 않고 대화하는 법’, 밤을 새워가며 소설책을 읽은 후에는 ‘특정 작가의 소설 정주행’, 혹은 서점 가판대에서 발견한 책 한 권으로 시작한 ‘양자물리학’과 같은 관념적인 주제까지 다양하다. 인생에서 부딪히는 문제들은 모두 덕질의 대상이 된다.
프로젝트라고 이름을 붙였지만, 나름의 취미활동이다. 프로젝트의 종결 시점은 질릴 때까지이다. 연구 기간은 제한이 없다. 짧게는 1~2주부터 길게는 몇 개월 동안 하나에 대해 생각하다 보면 주제가 확장되거나, 다음 주제로 자연스럽게 옮겨가거나 아니면 더 이상 궁금하지 않을 때가 온다. 질리는 시기가 오면 자연스레 책을 덮는다. 정해진 양을 완독 하거나 결과에 연연하기보다 흐름에 맡기는 편이다. 프로젝트 산출물 역시 정해진 양식은 없지만, 종종 떠오르는 생각을 정리하거나 발견한 내용을 기록으로 남긴다. 혹은 캡처해두고 싶은 책 구절이나 이미지가 있으면 저장해놓는다. 이것들을 컴퓨터와 핸드폰으로 연동하면 언제든지 궁금할 때 찾아보거나, 장소에 상관없이 프로젝트를 이어서 진행할 수 있다.
덕질은 주로 도서관이나 서점을 가는 것으로 시작했다. 인터넷에 검색하면 정보가 넘쳐나지만 책이 더 좋았다. 인터넷에는 정보를 쉽게 찾을 수 있지만, 필요 없는 정보를 거르는 데 시간이 걸렸다. 도서관에서 같은 주제의 책 여러 권의 목차를 펼쳐놓고 비교하면서 여러 책이 공통으로 말하는 중요한 개념이나 이슈들을 파악했다. 책들이 공통으로 다루는 내용을 읽으면 저자의 깊이나 수준도 자연스럽게 보였다.
책을 읽으면서 목차 다음으로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은 프롤로그였다. 프롤로그를 읽으면 저자의 결이 느껴졌다. 프롤로그에 어떤 마음으로, 왜 이 책을 썼는지가 드러나는데, 책을 쓴 목적이나 이유가 공감되지 않으면 뒷부분의 책 내용도 뜬구름을 잡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많았다. 또는, 저자의 의도는 공감이 가더라도 표현방식이나 사고의 전개 과정이 익숙하지 않으면 책 내용에 집중하기 어려웠다. 이것은 단순한 소설이나 에세이집뿐만 아니라, 방법론이나 하다못해 참고서도 마찬가지였다.
책을 읽을수록 책을 고르는 기준이 점점 주관적으로 변했다. 전체 내용이나 흐름이 더할 나위 없이 일목요연하고 깔끔했지만, 이상하게 나에게는 와 닿지 않는 책들이 있는가 하면, 또 어떤 책은 크게 독창적이거나 기발한 내용은 없지만 단숨에 읽히고 끌리는 책이 있었다. 책을 초반에 고를 때는 내용이 풍부한 책을 골랐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내가 좋은 책이 좋았다. 책이 마음에 들어야 한 번이라도 더 읽었다. 내가 편한 것이 중요했다. 책의 수준은 내 배경 지식과 상관이 있었다. 한 분야에 대한 용어들이 익숙해지고 배경 지식이 쌓이면 예전에는 어려워서 읽을 엄두가 나지 않았던 책들도 편하게 읽히는 순간이 생겼다. 어떤 경우에는 책의 전체 내용에는 크게 관심이 없지만, 책 전체 내용과 상관없는 한 챕터, 혹은 한 단락의 내용이 와 닿아서 읽는 경우도 있었다.
책에 대한 고정관념 때문인지 처음엔 책을 신성하게 여겼다. 저자의 생각을 절대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서 책을 읽을 때 밑줄을 긋거나 메모를 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책의 내용을 해석하고 소화하려면 내 생각이 필요했다. 책을 읽으면서 떠오르는 느낌, 반박 의견과 연관 키워드는 책을 읽을 때 가장 선명했다. 책을 읽고 다시 떠올리려고 하면 생각이 나지 않았다. 책을 읽으면서 빈 공간에 메모를 하기 시작했다. 책을 읽으면서 동시에 생각하고 기록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었다.
지금은 책은 누군가의 메모라고 생각한다. 빈 공책에 편하게 노트하는 것처럼, 책을 읽을 때는 누군가의 메모에 덧붙여서 내 생각을 빈 곳 사이사이에 적는다. 노트하면서 책을 읽으면 저자와 대화를 하는 느낌이다. 책을 읽으면서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서 책을 덮고 허공을 바라보거나 마음속으로 저자와 대화를 나눌 때가 많은데 그 시간이 참 좋다. 덕분에 책을 지저분해지지만, 한 권을 충분히 소화했다는 느낌이 든다. 어쩌면 책을 느리게 읽는 것에 대한 변명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작가의 한 단어와 한 문장을 두고 충분히 곱씹을 때 행복하다.
주체적으로 책을 읽으면서 학습하는 방법을 알게 된 것 같다. 나이가 들더라도 궁금한 것이 생기면 덕후 프로젝트를 계속할 것 같다. 이렇게 관심 있는 분야를 탐구하다 보면 연구자가 된 듯한 느낌이다.
책 정리를 하다 책을 줄일지 책장을 살지 고민을 했는데, 아무래도 책장을 새로 사야 할 것 같다. 아직 정리하기엔 아쉬운 책들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