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슬기로운 취미생활
삶은 선택의 연속이다. 여행을 계획할 때마다 이전에 좋았던 곳을 다시 갈지, 새로운 곳을 갈지 고민이다. 여러 번 가도 한결같이 좋은 곳이 있는가 하면, 별 기대 없이 갔다가 상상 이상으로 좋은 곳도 있다.
유럽을 여행하는 횟수가 늘어나면서, 파리나 바르셀로나처럼 여러 번 가는 도시들이 생겼다. 어떤 곳을 다시 찾게 되는 대는 단순히 관광지 한두 군데가 유별나게 좋아서라기보다는 도시의 전반적인 분위기에 꽂혀서일 때가 많았다. 여러 번 방문한 곳에서 관광 외에 다른 할 거리를 찾으면서 여행에 테마가 생겼다.
한창 춤에 빠져있을 때는 외국에서 열리는 행사를 찾아다녔다. 그중 하나가 센슈얼 바차타의 본고장인 카디즈에서 열린 워크숍이었다. 일주일 동안 시간표에 맞춰서 인종, 나이에 상관없이 수업을 들으면서 마치 대학생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해외 페스티벌에서 유튜브로만 보던 외국 댄서들을 만나고 같이 춤출 때는 꿈만 같았다.
좋아하는 외국 댄서에게 연락해서 현지에서 개인 강습을 받기도 했다. 취미를 통해서 만나면 언어나 문화가 달라도 처음 보는 현지인들과 소통할 수 있었다. 단순한 인사를 넘어서 그것이 인연이 되는 일도 있었다. 여행지에서 하는 취미생활의 매력이었다.
관광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자 여행의 폭이 한층 다양해졌다. 그때그때 관심 있는 분야에 따라서 여행의 테마가 정해졌다. 1주일 넘게 여행하면 운동을 못 해서 몸이 답답할 때가 많았는데, 여행 여정에 현지 요가 수업을 넣으면 여행 피로도 풀고 새로운 환경에서 요가 수업을 듣는 재미도 있었다. 한번은 음악 여행을 주제로 1일 1 라이브 공연을 들으면서 청각의 갈증을 채우기도 했다. 여행지에서의 취미생활은 취미를 더욱 사랑하게 해주는 동시에 여행의 스펙트럼을 넓혔다.
좋아하던 특정 인물을 테마로 여행하기도 했다. 모차르트의 발자취를 따라 고향과 활동지역을 돌아다니면 글로 읽을 때 보다 많은 것들이 보였다. 어렸을 때부터 신동이라는 이름으로 공연을 하며 유아기를 보낸 그가 사랑에 목말라하고 호화스러운 삶을 동경하게 되었는지, 잘츠부르크의 시골 총각에게 빈이 얼마나 화려했을지, 어렸을 때부터 계급사회에서 음악가로 생활한 그가 어떻게 기존의 체제를 벗어나 자유를 열망하게 되었는지, 잘 알려진 방탕한 생활과는 달리 얼마나 일 중독 수준으로 음악 활동에 매진했는지…. 에곤 실레, 클로드 모네, 파블로 피카소와 같은 다른 예술가들도 마찬가지였다. 고향이나 생가를 가보면 작품밖에 있는 한 인간이 보였다. 대형 박물관이나 미술관과는 또 다른 방식으로, 예술가의 작품세계를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여행지에서 보고 들은 단편적인 지식이 쌓이면서 역사 지식이 자연스럽게 그려졌다. 프랑스 바르세유궁전에서 마리 앙투아네트를 처음 접했을 때는 궁전 한구석의 튈르리 정원을 보면서 부풀려진 것보다 소박했던 오스트리아 출신 왕비로만 이해했다. 스위스 루체른에서는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를 마지막까지 지키다 전원 전사한 스위스 용병을 기리는 사자상을 보았는데, 프랑스혁명 이면의 스위스 전사들의 비장함과 절박함이 느껴졌다. 마리의 친정인 비엔나에서는 그녀가 얼마나 풍요로운 환경에서 살았는지, 14살 어린 나이에 정치적 이유로 외국으로 시집갔지만 환영받지 못했던 그녀의 외로웠던 삶이 입체적으로 느껴졌다. 유럽은 아는 만큼 보였다. 그냥 예쁜 건물도 의미를 알고 보면 행간의 의미가 느껴졌다. 예전에 한 귀로 흘릴법한 유럽의 과거를 눈으로 보고 느끼는 것은 여행의 묘미였다.
관광이 아닌 테마에 무게를 두면서 교통편이나 숙박을 당일 예약하는 경우가 늘었다. 특히 대도시는 수요보다 공급이 많았다. 숙소를 당일 예약하면 당일 할인가나 막판 취소로 구하기 어려운 호텔을 구하는 행운이 종종 따라왔다. 무엇보다 좋았던 것은 정해진 일정에 따라서 움직이지 않고 내 상황에 따라 스케줄을 편하게 조정할 수 있는 점이었다. 혹은 움직이지 않아도 괜찮았다. 하나에 꽂히면 그곳에 원하는 만큼 머물렀다. 진정한 테마 여행이었다.
한 곳에서 다른 도시로 이동할 때는 여행의 주제를 기념할 수 있는 마그넷을 샀다. 내가 그곳에서 보냈던 가장 의미 있는 한 때를 기억할 수 있는 디자인을 찾다 보면, 마그넷을 고르는 작업은 아쉽지만 즐거웠다. 카디즈에서는 춤추는 모습의 마그넷을, 빈에서는 모차르트 음악 악보 모양의 마그넷을 골랐다.
어디를 가느냐도 중요하지만, 그곳에서 무엇을 하느냐는 여행의 또 다른 재미다. 내가 그토록 여행을 좋았던 건 경험 때문이었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