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가 가기 전에, 유럽여행

3. 슬기로운 취미생활

by 지금

배낭여행에 대한 환상이 있었다. 저질 체력에 번거로운 것을 싫어하던 나였지만, 단어가 주는 로망이 있었다. 청춘이 가기 전에 한 번쯤은 배낭을 메고 정해진 것 없이 여행을 떠나고 싶었다.


회사를 다니면서 동남아, 중국, 일본은 틈틈이 주말을 껴서 놀러 갔지만, 유럽은 엄두가 나지 않았다. 휴가의 이틀을 10시간이 넘게 걸리는 거리를 오가며 교통에 쓰기에 아까웠고, 영화와 글을 통해서 접한 유럽은 도도하고 어렵다는 편견이 있었다. 친근한 미국악센트와 달리 한 단어씩 콕콕 짚어주는 영화 속 영국 악센트나, 영어로 말하면 대답을 거부한다는 프랑스 문화 얘기를 들으면 그 자부심이 멋있어 보이면서도 꺼려졌다.


그럼에도 시간을 내서 맨몸으로 부딪히는 여행을 한다면, 평소에 엄두 낼 수 없었던 유럽을 가고 싶었다. 추석 연휴에 여름휴가를 붙여서 최대한 여행 기간을 확보했다. 유럽을 가본 적이 없어서 어디부터 갈지 애매했다. 가장 가고 싶었던 도시 네 군데를 골랐다. 혼자 여행을 가본 적이 없던 터라 뭘 준비해야 할지 몰랐다. 주위의 도움을 받아 비행기 표, 숙소와 교통편을 예약하고, 환전, 유심카드를 사는 것으로 첫 유럽여행 준비를 마쳤다.


파리공항에 도착했을 때 밤 11시가 가까웠다. 구글을 켜서 그제야 숙소 가는 길을 검색했다. 교통편 확인하랴, 교통카드를 사라 이리저리 헤매다 보니 숙소에 도착했을 때는 자정을 훌쩍 넘은 새벽이었다.


다음 날 아침, 뭘 해야겠다고 정한 게 없었다. 영화에서 봤던 에펠 타워, 루브르박물관부터 차례차례 돌아봤다. 관광지는 하나같이 감탄을 자아냈고, 사람들은 넘쳐났다. 길거리는 아름다웠고 오래된 건물들은 낭만적이었으며 사람들의 옷차림은 맵시가 있었다. 처음 여행할 때만 해도 역사나 미술에 관심이 없던 터라, 평소에도 가지 않는 미술관이나 박물관에서 시간을 보내고 싶지 않았다. 목적지 없이 걷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걷다가 배가 고프면 밥을 사 먹고 잠시 쉬다 돌아다니는 것의 반복이었다. 해가 지면 집으로 오거나 동행을 구해서 같이 식사했다.


다음날도 마찬가지였다. 눈을 뜨면 가고 싶은 곳이 있으면 가고, 가고 싶은 곳이 없으면 벤치에 가만히 앉아있다가 배가 고프면 밥을 먹고…. 하루하루가 즉흥적이었다. 걷다 보면 하루가 갔다. 구글 앱 덕분에 따로 시간을 내서 알아볼 필요가 없었다. 여행 중에 만난 동행들의 추천을 듣는 것만으로도 정보는 넘쳤다. 어떤 동행분이 파리 여행 책자를 건네줬는데, 어느 날은 아침에 무작정 책을 펼쳐서 나오는 곳을 갔다. 파리에서의 6일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다른 여행지도 비슷했다. 눈이 떠지면 일어나서 커피숍에서 크로아상과 라떼로 아침을 먹고, 관광지 한두 군데를 돌아다니고, 다리가 아프면 커피숍에 들어가서 잠시 쉬고, 또 걷다가 배가 고프면 현지 음식을 사 먹고, 여행 중에 사람을 만나면 함께 또 따로 지내면서 시간이 흘렀다.


거리는 가까웠지만, 도시마다 첫인상이 달랐다. 파리가 화려함과 로맨틱함의 절정이었다면, 스위스는 좀 더 격식있고 고급스럽고, 피렌체는 아기자기하고, 바르셀로나는 날씨만큼이나 정열적이고 다이나믹했다. 책으로만 보던 장소를 피부로 체험하면서 도시에 인상이 생겼다. 그전까지 감흥없던 곳에 호불호가 생기는 것이 신기했다. 구글 맵에 내가 좋아하는 장소를 표시하는 것도 재미있었다. 여행한 지 2주가 가까워지면서 일상이 희미해졌다. 평생 이렇게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첫 여행 이후로 유럽에 빠져버렸다. 그 후로 몇 년을 틈만 나면 유럽으로 날아갔다. 가장 자주 갔던 해에는 일 년에 4번을 갔다. 나라마다, 도시마다 달라서 여행을 가도 끝이 없었다. 여행에서 돌아오면 여행지에서 사 온 마그넷을 보면서 다음 여행을 기약했다.


여행 중에 항상 좋았던 일만 있던 것은 아니었다. 공항에서 나오기도 전에 소매치기를 당하고, 스위스 리기산 한가운데서 길을 잃고, 말도 안 되는 바가지를 쓰기도 했다. 연고 없는 곳에서 어떡하나 싶을 때도 있었지만, 생각지도 못한 사람들의 도움으로 문제가 풀렸다. 하늘이 무너진다고 생각할 때마다 솟아 날 구멍이 있었다. 손해 보는 것에 집착하지 않으면 여행은 재미있었다. 잘못 든 길에서 더 좋은 장소를 발견하거나 새로운 사람을 만나서 인연으로 발전하기도 했다. 여행 초기에는 소매치기를 당하면 밤에 잠도 못 잘 만큼 속상해했지만, 나중에는 가방에 손을 넣는 소매치기의 손을 붙잡는 여유도 생겼다.


여행의 횟수가 늘어나면서 여행의 모습이 바뀌었다. 처음에는 배낭여행 자체가 도전이었지만, 배낭여행은 회를 거듭하면서 진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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