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화, 일상에 아름다움 한 스푼

3. 슬기로운 취미생활

by 지금

어렸을 때 서예를 배웠다. 한번 물들면 지워지지 않는 먹물 덕분에 옷은 항상 먹물 자국으로 얼룩져 있었다. 특히나 새로 산 예쁜 옷을 입고 서예학원에 갔다가 옷소매에 먹물이 묻은 날이면 온종일 속상했다. 옷을 버려가면서도 7년을 배웠던 것을 보면 서예가 많이 좋았나 보다.


자연과학을 전공하면서 예술을 가까이 접할 기회가 별로 없었지만, 미술관에 가면 기분전환이 되었다. 화려하면서도 정돈된 미술관의 분위기가 참 좋았다. 미술작품에 대한 배경 지식이 별로 없어도 한 번씩 꽂히는 작품들이 있었다. 그중 하나가 에곤 실레의 ‘죽음과 소녀’였는데, 생명이 없는 미술작품이지만 아우라가 느껴졌다. 작품에서 느껴지는 생생하고 강렬한 느낌 탓에 옆면에 빼곡하게 적힌 작품 소개 문구가 칙칙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글로 표현할 수 없는 날 것의 느낌이 있었다. 에곤 실레의 삶은 불행했을지언정, 시대를 초월해서 소통할 수 있는 걸작을 남긴 그가 진심으로 부러웠다. 미술관을 나서며 나도 미술을 배우기로 했다. 걸작이 아니더라도, 삶에서 경험하는 느낌들을 표현하고 살기로 마음먹었다.


붓을 드는 순간 숨겨져 있던 나의 천부적인 미술 재능이 폭발하지 않을까 내심 기대했지만, 현실은 연필로 선 긋기부터 시작했다. 선 긋기가 지루해질 무렵 드로잉을 연습하고, 그 후에 본격적으로 작품을 그렸다. 드로잉의 비율과 디테일을 배울수록 그림 실력은 노동으로 완성되는 것임을 깨달았다. 안타깝지만 내 그림 실력에는 한방이 없었다.


그림에 집중하는 순간이 좋았다. 어느 날은 마음처럼 붓질이 편안하고 그림이 슥슥 완성되는 날이 있는가 하면, 어떤 날은 한 그림을 그리다 말고 미리부터 다음 작품을 열심히 구상하는 날도 있고, 유난히 진도가 더디고 그림을 완성하기 버거운 날도 있었다. 그림이 잘 그려지든, 그렇지 않든 캔버스를 바라보고 있으면 삶이 캔버스 안으로 축소되는 것 같았다.


그림 그리면서 사람들과 대화하는 것도 좋았다. 그림에 집중하다 잠시 쉬어가기 위해서 시시콜콜한 농담들을 종종 주고받았는데, 언제 시작하고 어떻게 마무리되었는지도 모르게 대화들이 스쳐 갔다. 다들 시선을 물감과 캔버스에 고정한 채, 가볍게 이야기 나누다 보면 별별 얘기들이 나왔다. 심각한 얘기도 그렇게 흘러가듯 얘기해버리면 별일 아닌 것 같았다.


그림을 그리면 몇 시간이 금방 지나갔다. 아쉬운 마음으로 붓을 씻고 팔레트를 정리하면 좋아하는 일을 했다는 뿌듯함과 하나에 집중하고 난 후의 개운함이 버무려져서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한 작품을 완성하면 집을 꾸미는 재미가 있었다. 내가 직접 그린 작품들을 집에 걸어두면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었다. 집안 분위기를 바꾸려고 인테리어 소품을 사는 것보다 훨씬 의미 있었다. 집안 분위기와 공간을 고려해서, 장소별로 전시하고 싶은 작품을 그렸다. 거실은 숲 속 같은 청량한 느낌을 내고자 풍성한 나무나 푸른 하늘을, 화장실에는 여름의 해 질 녘 노을, 침실에는 다양한 꽃 그림을 걸었다. 계절에 따라, 기분에 따라 집안 분위기를 바꾸고 싶을 때, 가구를 바꾸기 전에 새로운 작품을 전시하면 신선했다. 미술을 시작하면서 집 이전 시공간이 되었다.


그림을 배우면서 주변을 아름답게 만드는 데 관심이 생겼다. 예전에는 예쁜 카페, 레스토랑, 호텔을 찾아다니며 아름다움을 소비했다. 예쁜 것을 감상하는 법은 알았지만, 스스로 주위를 아름답게 만들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요리하면 밥을 사 먹을 필요가 없는 것처럼, 주변 환경이 아름다우면 구태여 예쁜 곳을 찾아다닐 필요가 없었다. 내가 주변을 아름답게 만들 수 있으면, 손길이 닿는 곳은 자연스럽게 아름답게 변했다. 그동안 주변에 관심을 가지지 못했는데, 관심을 가지면서 집, 핸드폰 배경 등 생활환경 곳곳이 아름다워졌다. 소비의 대상이었던 예쁜 장소, 패션 트렌드는 일상에 적용하기 위한 배움의 대상이 되었다.


유화를 시작하면서 예전처럼 옷이 종종 더러워진다. 완전히 마르는데 몇 주씩 걸리는 유화물감 덕분에, 마른 줄 알고 작품을 만졌다가 옷에 얼룩이 묻는다. 미술학원을 다닌 후로 못 입게 된 옷이 여러 벌이다. 속상한 마음에 이리저리 씻어보다가 어렸을 때 서예를 배우던 생각이 나서 피식 웃음이 난다. 옷을 못 입게 된 건 속상하지만, 계속 그림을 그리고 싶다. 예술 감각이 늘면 언젠가 옷의 얼룩도 예술로 승화시키는 날이 올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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