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렁탕 한 그릇이 준 승인서.
입사한 지 2년쯤 되었을 때, 미국 출장을 가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때는 2G 휴대폰을 개발하던 시절이었다.
실리콘밸리 Yahoo 본사에 가서 우리가 만든 휴대폰의 이메일 기능을 승인받아오는 게 목적이었다.
당시 Yahoo는 지금의 구글이나 네이버보다 훨씬 강력한 포털계의 대장이었다.
팀장은 신신당부했다.
"반드시 승인을 받아와야 한다."
신입 티를 갓 벗은 나에게 왜 이런 중대한 일을 맡겼는지는 알 수 없었다.
책임감은 넘쳤지만 출발 전부터 걱정이 앞섰다.
혼자서 낯선 곳을 찾아가야 하는 부담, 영어로 제대로 설명할 수 있을까 하는 불안,
과연 승인을 받아올 수 있을까 하는 압박감까지.
막상 출발은 순조로웠다.
렌터카를 찾아 고속도로를 달려 숙소에 체크인했고, 회사 사무실까지 무사히 도착했다.
그러나 Yahoo와 본격적인 미팅이 시작되자 상황은 달라졌다.
휴대폰을 건네고 테스트를 부탁했지만,
내가 겨우 입 밖에 낸 말은 "Please test..." 그뿐이었다.
대화로 상황을 풀 수 없으니 사무실 앞에서 몇 시간이고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테스트 후 담당자가 쥐어주는 문제점을 받아 한국 팀에 전달하고,
수정된 바이너리를 다시 설치해 Yahoo에 가져가는 일을 며칠이고 반복했다.
승인은 쉽게 나지 않았다.
한국에서는 “잘 이야기해서 꼭 받아내라”라고 했지만,
한국어로도 설득하기 어려운 문제를 영어로 설명하기는 불가능에 가까웠다.
출장은 길어졌고, 예약된 숙소기간도 끝이 났다.
학회 시즌이라 지역 호텔은 전부 만실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회사 담당자는 '일일 숙박 한도에 맞춰 직접 숙소를 찾아 예약하고 결제한 뒤 청구하라'는 친절하지만 무책임한 말을 전했다.
지금처럼 인터넷 검색도 쉽지 않고, 통역앱도 없던 시절이었다
낯선 땅에서 대화조차 서툰 내가 숙소를 직접 구해야 한다니.
길거리에서 자야 하나 하는 두려움이 엄습했다.
무작정 차를 몰고 어딘가에 있을 숙소를 찾아 달렸다.
"ㅇㅇ설렁탕", "한인마트", 그리고 한국 사람들.
한인타운이었다.
살았다.
마트에서 라면과 김치를 사고, 국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설렁탕도 한 그릇 했다.
한인 숙소도 어렵지 않게 구해 베이스캠프를 옮기고 나니 두려움이 사라졌다.
Yahoo 담당자에게 승인해 달라며 매달릴 용기까지 생겼다.
출장은 여전히 벅찼지만, 그 순간부터는 믿는 구석이 생겼다고나 할까?
결과적으로 승인은 받지 못했다.
돌아오는 공항에서 가방 가득한 휴대폰 때문에 붙잡혀 한참 조사를 받기도 했다.
회사에서는 비싼 출장비를 쓰고 성과가 없었다고 눈치를 줬다.
그럼에도 그때 한인타운에서 먹은 설렁탕 맛은 지금도 선명하다.
아무도 내 편이 아닐 거라 생각했던 곳에서,
뜻밖에 만난 내 편이 주는 든든함. 그게 그 출장에서 내가 얻은 가장 값진 승인서였는지도 모른다.
최근 미국 출장지에서 구금까지 당한 한국 직원들의 뉴스를 보면서,
20년 전 그때의 기억이 다시 떠올랐다.
돌이켜보면 그때의 두려움과 막막함, 그리고 우연히 찾아낸 편안함까지.
웃지 못할 해프닝처럼 보였던 경험이,
시간이 흘러 돌아보니 나를 버티게 한 작은 힘이 아니었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