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이 남아있는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와 매주 일요일 목욕탕을 다녔다.
남들보다 일찍 가야 깨끗한 물로 씻을 수 있다고
아버지는 늘 서두르셨다.
잠이 덜 깬 채 아버지 뒤를 졸졸 따라가
참기 힘든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고
5분 이상 가만히 앉아 있는 일은
즐겁지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아버지와 함께 한 몇 안 되는 기억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미화되는 경향이 있다.
새벽 공기를 가르며 걷는 그 길이 좋았던 것 같기도 하고,
목욕 끝난 후, 늘 사주신 바나나맛 단지우유가 유난히 달았다.
내가 아빠가 되고 아버지와 함께한 추억을 따라 해본 적이 있다.
내가 좋았다고 믿는 것을
아무 의심 없이 두 아들에게 그대로 물려주고 싶어서였다.
하지만 아이들은 고개를 저었다.
"바나나 우유 말고 다른 거 마실래."
"어.. 그래. 다른 것 골라"
이후로 아이들은 아빠와의 새벽 동행 대신, 여유로운 휴일의 늦잠을 선택했다.
그렇다고 서운한가?
아니.. 사실 난 혼자 가는 사우나를 더 선호한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이십 대 집을 떠나 직장인이 되고 삶이 빨라지면서
아버지와의 목욕탕 추억은 점점 흐려졌지만
주말 아침 사우나만큼은 이상하게 포기되지 않았다.
뜨끈한 탕에 몸을 담그고 눈을 감으면
그 한 주가 조용히 내려앉았다.
말없이 씻겨 내려가는 생각들,
찰나의 평온.
어린 시절 아버지의 습관에 자연스레 공감이 가는 시간이다.
다만 혼자 오면 늘 문제였다.
등.
혼자선 절대 닿지 않는 그곳.
그래도 예전엔 나와 비슷한 처지의 사람과 눈빛만 교환하면
말없이 등을 맡기는 그런 묘한 신뢰가 가능했다.
물론 아주 예전 이야기다.
아마도 결혼 즈음이었던 것 같다.
평일엔 늦게까지 일하고 주말은 결혼 준비로 몸과 마음이 모두 지쳐 있던 어느 날.
사우나엔 왔지만 내 몸 하나 제대로 씻을 힘이 없었다.
그때 눈에 들어온 문구.
'때 밀어드립니다.'
부끄러움보다 피곤함이 먼저였다.
입구에서 망설이고 있던 나에게
증기 속을 가르는 우렁찬 목소리.
"바로 누우세요!"
그 뒤로는 거의 기억이 없다.
옆으로, 뒤로, 반대로..
아저씨의 구령에 맞춰 몸을 굴렸고
팔꿈치 지압이 통증과 쾌감 사이를 정확히 찔렀다.
"끝났습니다."
그 말에 정신이 돌아왔고
나는 반사적으로
너무도 공손하게, 90도로 인사를 하고 나왔다.
그리고 집에 오는 내내 몇 번이고 중얼거렸다.
'와... 이게 뭐지.'
'너무... 너무 시원하다.'
그날 이후 나는 세신 아저씨에 완전히 중독됐다.
몇 번의 이사로 아저씨도 바뀌었다.
각자 보유한 테크닉과 다른 리듬이 분명 있지만
내 몸은 그 어떤 새로운 것을 만날 때보다 빠르게 적응했다.
탕탕탕.
꾹꾹꾹.
한 주 동안 굳어 있던 몸이 스르르 풀리는 그 순간은
한주의 마무리를 위한 필수 코스로 자리 잡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좋은 건
그 순간이 아무 생각을 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이란 점이다.
"누우세요." 하면 눕고
"돌아누우세요." 하면 돌아눕고
나는 그냥
시키는 대로 몸만 움직이면 됐다.
그 단순함이 좋았다.
내가 아무 결정을 하지 않아도 되는 상태.
나는 그 편안함에 빠져버렸다.
내일 새벽,
조용히 문을 열고 나갈 시간이 기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