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또

by 곱게자란아빠

대학원 시절, 연구실 창문 밖으로 동네 편의점이 보였다.

크게 눈에 띄는 곳도 아니고,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는 편의점인데

주말만 되면 그 앞으로 길게 줄이 섰다.

연구실 선배에게 물어보니 로또 때문이라고 했다.

당첨자가 꽤 나온 명당이라

사람들이 찾아온다는 이야기였다.


그때 나는 고개만 끄덕였다.

호기심이 아주 없었던 건 아니지만,

사행성에 큰 관심이 없었고,

당시에는 내가 노력하면 어쨌든 다 될 거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 같은 걸 갖고 있었다.

길게 늘어 선 로또 줄은

그저 창문 밖 풍경 중 하나였다.


2년이 흘렀다.

졸업 논문이 잘 안 됐다.

잘 안 된다는 말로는 부족할 정도로 잘 안 됐다.

하루는 써놓은 문장을 지우느라 끝났고,

하루는 지운 문장을 다시 쓰느라 끝났다.

매일이 비슷했고,

매일이 조금씩 더 힘들어졌다.


그러던 어느 날,

무심코 블라인드를 치다가 밖을 내다봤다.

그리고 그 줄을 다시 만났다.

여전히 편의점 앞에는 사람들이 길게 서 있었다.

그날은

이상하게 내려가고 싶었다.

로또가 내 인생을 바꿀 거라고

진지하게 믿었던 건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 순간만큼은 그 줄이

조금 덜 막막해 보였다.


사람이 정말 힘들어지면,

믿지 않던 것에도 손이 간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그게 처음이었다.

그리고 그 뒤로는 또 별 관심이 없었다.

한두 개 맞은 숫자를 보며,

괜히 진지해진 내가

조금 우스워졌기 때문이다.




입사하고

10년쯤 되었을 때였다.

12월 말이 되면

회사는 조용해진다.

회의실도 비고, 메일도 뜸해진다.


그 무렵,

늘 미간에 주름을 달고 살던 선배가

유난히 들뜬 얼굴로 휴가를 떠났다.


"나 1년에 한 번은 2박 3일로 강원도 호텔에 가."

"가족이랑요?"

"아니, 혼자."


결혼 초부터 아내와 합의된 혼자만의 휴가라고 했다.

호텔에서 조용히 책을 읽고,

밥을 먹고,

아무 일정도 없이 시간을 보낸다고 했다.

그리고 그 휴가에 항상 함께하는 게 로또라고 했다.


"로또요?"

"사실 매주 사는데, 확인은 안 해. 연말 되면 한 50장쯤 모이지."


그 휴가 기간, 한 번에 다 확인한다고 했다.

이번 휴가가 끝나도 회사로 돌아오지 않으면

그게 터진 거라고 찾지 말라고도 했다.

웃긴 말이었는데

웃기기만 한 말은 아니었다.


로또를 왜 사냐고 묻자

선배는 잠시 생각하다

이렇게 말했다.


"회사를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무기를 모으는 기분이야."


매주 확인하지 않는 이유도 덧붙였다.

조금 더 힘들 때,

조금 더 회사가 나를 미치게 할 때,

그때 확인해 보려고 아껴둔다고 했다.

마치 상비약을 서랍에 넣어두듯이,

정말 필요한 날을 위해서.


그 선배는 그 이후로도

10년 넘게 같은 휴가를 다니고 있다.

그리고 여전히

2박 3일 뒤에는

아무 일 없다는 듯 회사로 돌아온다.




후배 서 과장은 아주 소박하고 검소한 사람이다.

헛돈을 절대 쓰지 않고,

재테크도 예금 위주로만 하는 친구다.

그 친구가 자기에게 주는

유일한 소비가 하나 있다고 했다.

1년에 딱 5만원.


"연초에 온라인 로또 사이트에

5만 원을 충전해 둬요.

그리고 일주일에 한 번씩

천 원으로 로또 한 장을 사요."

"그러면 5만 원 넘지 않아?"

내가 묻자 후배는 말했다.

"사다 보면

한 번씩 5천 원이나 그 이상 당첨돼요.

그래서 5만 원이면

1년을 버틸 수 있어요."


그는 그 돈을

대박을 위한 투자라고 부르지 않았다.

그냥 소소한 취미 생활이라고 했다.


"힘들고 스트레스 받을 때

풀 수 있는 게 하나는 필요하잖아요.

저한테는 그게

천 원짜리 복권이에요."




3년 전부터 나도 시작했다.

연초에 5만 원을 충전하고

매주 천 원치 로또를 산다.

다만 나는 확인을 하지 않는다.

그냥 쌓아 둔다.


정말 힘들어서

'에이, 더러워서 못 해 먹겠다' 싶은 날이 오면

그때 열어보려고 한다.

확인하지 않은 로또가 있다는 사실이

나를 하루 더 버티게 한다.


당첨 확률이 낮다는 것도 알고,

그걸로 현실을 회피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없다는 것도 안다.


그럼에도

나는 이번 주 천 원을 썼다.

그리고 또 한 주를 버틸 준비를 한다.


아직 확인하지 않은 로또가 있다.

그래서

이번 주도

그냥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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