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 후 충전

by 곱게자란아빠

퇴근 후 충전

결혼을 하고 아이가 막 태어났을 무렵,

회사는 유난히 바빴다.

밤 11시, 혹은 12시.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하루의 마침표라기보다는

제2의 출근을 알리는 알람처럼 느껴지던 시기였다.


문을 열면

육아로 하루를 다 써버린 아내가 있었고,

잠투정인지 하루의 마지막 인사인지 모를

아이의 칭얼거림이 기다리고 있었다.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부모로서, 남편으로서

당연히 감당해야 할 몫이라는 걸.

하지만 몸은 늘 정직해서

그걸 고통으로 먼저 받아들였다.


그런데 가끔,

현관에 들어서는 순간

거실 불이 꺼져 있고

집 안이 조용한 날이 있었다.


모두가 잠든 날.


그날은

마치 뜻밖의 휴가를 받은 사람처럼

마음에 여유가 생겼다.

혹시라도 이 평화가 끝날까 봐

발뒤꿈치를 들고 조심조심 걸었다.

냉장고 문도, 캔맥주도

최대한 소리를 죽여 꺼냈다.


맥주 한 캔,

좋아하는 미드 한 편의 딱 30분.

그 고요한 30분은 참 달았다.

말 그대로 꿀맛이었다.


비슷한 시기,

나와 같은 나이에

비슷한 처지였던 회사 동기가

정반대의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그는

늦은 밤 집에 들어갔을 때

불이 꺼져 있으면

기분이 가라앉는다고 했다.


모두가 잠들어 있으면

가족을 위해 하루를 갈아 넣은 자신의 시간이

보람 없이 증발해 버린 것 같다고 했다.


아이의 칭얼거림도,

아내의 지친 얼굴도

그에게는

자기를 반겨주는 온기라서

그게 없으면 오히려 더 힘들다고 했다.


우리는

같은 상황에서

전혀 다른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서로를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나도

그 온기가 무엇인지는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다만 그때의 나는

당장의 피로 앞에서

고요를 선택했을 뿐이다.




시간이 흘러 아이들은 훌쩍 자랐다.

목소리는 굵어졌고,

덩치는 어느새 나를 위협한다.


요즘은

내가 늦게 퇴근해도

집이 깨어 있다.

아이들이 아직 '퇴근 전'이기 때문이다.

각자 책상에 앉아

밀린 숙제와 씨름하다가

도어록 소리에 맞춰

어슬렁어슬렁 나온다.


"아빠 왔어요...."


들릴 듯 말 듯한,

굵어진 목소리로 인사를 하고

내 등을 몇 번 두드려준다.

그리고는 아무 일 없다는 듯

다시 책상으로 돌아간다.


손을 씻고

거실 소파에 몸을 눕히면

잠시 후

아이들이 하나둘 다가온다.


순서는 일정치 않다.

큰아들이 먼저일 때도 있고,

작은아들이 먼저일 때도 있다.

녀석들은

내 배 위로 털썩 몸을 포개 눕는다


"아빠 충전 중."


이제 둘이 동시에 올라오면

'억' 소리가 절로 나온다.

아이들이 이렇게 컸다는 사실이

그제야 몸으로 느껴진다.


그런데 그 묵직한 압박 속에서

정말로 무언가가 충전되는 기분이 든다.


언제부터 이런 루틴이 생겼는지는 모르겠다.

아마도, 예전에 동기가 말했던

그 '온기'가 무엇인지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확인해보고 싶어 졌던 것 같다.


초등학교 저학년 무렵부터

퇴근하면 아이들을 번쩍 안아

내 배 위에 올려놓고

말없이 서로의 온기를 나눴다.


가끔 에너지가 남아 있는 날에는

아내도 합류한다.

그러면 네 식구가 소파 위에 세로로 겹겹이 쌓인다.

나는 괴성을 지른다.


"아이고.. 이게 이 집 가장의 무게구나!"

"내려가, 내려가!"


입으로는 투덜거리지만

가슴을 가득 채우는

묵직하고 따뜻한 감각은

너무도 분명하다.


어릴 적

혼자 숨죽여 즐기던

캔맥주의 가벼운 꿀맛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행복이다.


이 아이들이 언제까지

"아빠 충전"이라며

나를 깔고 덮을지는 모르겠다.


조금 더 크면 서로 민망해져

이 루틴도 자연스럽게 사라질지 모른다.


그래도 아직은,

가족이 포개지며 남기는

이 무게의 감각이

조금 더 오래 이어지기를 바란다.


오늘도 나는 소파에 누워

기꺼이 짓눌린다.


퇴근 후 충전.

이 기분 좋은 중독이

당분간은 계속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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