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일 선물
나이 셈이 달라진 뒤로
나이를 잘 모른 채 산다.
연 나이인지, 만 나이인지,
어디까지가 아직이고 어디부터가 벌써인지 헷갈린다.
나 같은 사람이 많은지
생일과 오늘 날짜를 넣으면
정확한 나이를 계산해 주는 서비스도 있다.
심지어 연 나이, 만 나이를 나눠서 알려준다.
나이 앞자리가 바뀔 즈음이라
한 번씩 바뀌었나 싶어서 검색을 해보기도 했다.
아직 남았다는 사실 하나로
괜히 마음이 평온해진다.
지난 생일날 이야기다.
나는 오래전부터 생일날이면 연차를 냈다.
큰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니고,
그냥, 그러고 싶었다.
오롯이 나만을 위한 하루를 보내겠다는 생각에서 시작해 매년 조금씩 그날 해야 할 일의 규칙을 붙여갔다.
병원 오픈 시간에 맞춰 스케일링을 받고,
극장에 가서 가장 인기 있는 영화를 혼자 조용히 본다.
서점에서 신간을 뒤적이기도,
목적지도 없는 드라이브를 하기도 했다.
작년에는 큰 강을 찾아
말없이 낚싯대를 드리웠다.
돌아오는 길엔 다이소에 들러
펜과 공책을 여러 개 샀다.
재작년에는
정년 퇴임하신 지도교수님을 뵈러 대전을 갔다.
돌아오는 길에 성심당에서 자축 케이크를 사서
가족과 조촐하게 파티로 마무리를 했다.
40대 후반의 아저씨가
마음먹고 낸 휴가치고는
너무 소박한 하루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평범한 하루조차
일상에서는 쉽게 허락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이 하루를
나에게 주는 생일 선물이라고 불렀고,
합법적인 일탈이라고 생각했다.
부러웠던 지
최근에는 꽤 많은 동료들이
이러한 일탈을 따라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올해는 출근을 했다.
오래 함께 일한 동료들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생일인데 휴가 안 썼어요?"
이번 달 공휴일이 많아
밀린 업무를 처리해야 해서라고 말하며
원인을 회사로 자연스럽게 돌렸다.
그리고 내년엔 다시 쉬겠다는 여지도 슬쩍 남겼다.
사실은 달랐다.
이번 달 휴무일에도 나는 출근했고,
일부러 일을 남겨두지도 않았다.
나는 며칠 뒤에 있을
나만의 일탈을 준비하고 있었다.
당일 아침.
여느 날과 다를 바 없는 하루였다.
아이들 아침을 챙기고,
등교를 재촉하고,
출근 준비를 했다.
둘째가 늦잠을 자는 바람에
조금 잔소리를 했다는 것만 빼면.
평소보다 몇 분 늦어졌고,
회사 가는 길은 유난히 막혔다.
고속도로 진입로부터 꽉 들어찬 차들을 보며
휴대전화를 확인했을 때
'고객님의 생일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라는
문자가 몇 통 와 있었다.
그제야 머리가 잠시 멈췄다.
'아, 오늘이구나.'
그리고 나는
길게 늘어선 차들과 함께
아무 일 없다는 듯 고속도로에 올라섰다.
나이 앞자리가 바뀌는 게
기억의 영역까지 침범한 걸까.
그동안은 '이 나이에 생일이 대수냐'라는 말을
민망함을 가리기 위한 표현으로만 썼는데,
정말로 대수가 아닌 날이 되어버렸다.
아쉽다.
눈앞에서 놓친 물고기가 더 아쉽듯,
합법적으로 방탕할 수 있었던
소중한 하루를 그냥 흘려보낸 게.
그래도 다행인 건
이걸로 끝난 건 아니라는 점이다.
생일날의 은밀한 일탈은
올해만 잠깐 미뤄졌을 뿐,
내년에는 또 아무렇지 않게
나를 부를 것 같다.
아무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