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을 하지 않기로 한 오후

by 곱게자란아빠

점심시간이 끝난 지 20분이 지났다.


유리창 너머 탕비실 옆 소파에 팀원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무슨 이야기가 그렇게 즐거운지,

한 친구는 몸을 뒤로 젖히며 웃음을 터뜨린다.


내 책상 위 모니터에는 이번 주말까지 끝내야 할 업무 목록이 빼곡하다.
반면 그들의 시간은 아직 12시에 머물러 있는 듯하다.


속에서 무언가가 불쑥 올라온다.
‘꼰대’라는 말은 여전히 듣기 싫지만,
관리자로서의 감각이 먼저 말을 건다.


가서 한마디 해야 하나.
오후 일정은 확인했는지 묻는 정도면 괜찮을까.


입술이 잠깐 달싹거린다.
자판을 두드리는 손끝에 괜히 힘이 들어간다.


문득, 내가 신입이던 시절의 오후가 떠오른다.


그때의 우리도 다르지 않았다.
어쩌면 더 심했을지도 모른다.


코드를 수정하고,
그 코드가 제대로 동작하는지 확인하려면
최소 한 시간은 족히 걸리던 시절이었다.


지금처럼 장비도, 인프라도 좋지 않았으니
그 시간은 그저 기다림의 연속이었다.


수정한 코드가 무사히 돌아가길 바라며
기도를 하거나,
주변 동료들과 의미 없는 이야기를 나누던 시간.


“빌드 돌려놨어.”


그 말 한마디면 모든 게 설명됐다.


복도 끝 자판기 앞에서 세상을 논하고,
풀리지 않는 버그 이야기를 하다가,
가끔은 상사 흉을 보며
굳어 있던 머리를 잠시 풀어놓기도 했다.


지금의 팀원들에게는
그런 ‘무적의 방패’가 없다.


장비는 좋아졌고 서버는 강력해졌다.
빌드는 눈 깜짝할 새 끝나고,
툴은 실시간으로 에러를 잡아낸다.


기계가 쉼 없이 돌아가는 만큼
개발자의 뇌도 멈출 틈이 없다.


기술이 빨라진 만큼,
사람이 쉴 수 있는 시간은
이제 스스로 만들어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탕비실에서 새어 나오는 웃음소리가
조금 다르게 들린다.


저 시간은
단순히 노는 시간이 아닐지도 모른다.

기술이 앗아간 생각의 틈을
잠시 되찾는 시간일 수도 있고,
조여 있던 코드 사이에서
숨을 고르는 방식일 수도 있겠다.


물론 시계는 여전히 1시 반을 향해 가고,
내 마음 한구석의 답답함도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는다.


그래도 오늘은
입을 열지 않기로 했다.


말을 보태지 않는 것도
때로는 관리자의 선택이니까.


잔소리 대신 메신저 창을 닫고
창밖을 한번 본다.


자판기 커피 한 잔으로
느슨해졌던 오래전의 오후가,
저들의 수다 속에서도
잠깐쯤은 숨 쉬고 있기를 바라면서.


기술이 빨라질수록,

쉬는 건 더 용기가 필요한 일이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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