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형, 취직하려면 공대 가야 할 것 같은데… 건축공학과 어때요?"
“너 그림 잘 그려?”
“아뇨.”
“거긴 설계하잖아. 그림 좀 돼야 해.”
“그럼 기계과는요?”
“기계나 토목은 거의 다 남자야. 괜찮겠어?”
“흠… 그럼 어디가 좋아요?”
“컴퓨터 좀 해봤어?”
“어릴 때 학원 몇 달 다녔어요.”
“요즘 컴퓨터가 좀 잘 나가는 것 같던데.”
대학교 원서를 넣기 전날 밤.
뒷집에 살던 대학생 형과 나눈 짧은 대화였다.
그 형은 내가 아는 유일한 대학생이었고,
그래서 그 말은
내게 꽤 그럴듯한 조언처럼 들렸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형의 전공은 경영학과였다.
하지만
그때 선택한 컴퓨터 전공은 생각보다 나와 잘 맞았다.
대학원을 진학했고,
졸업하면 근처 국가 연구소로 취직하는 게 일반적이라
나도 연구원이 되나 보다 생각을 했었다.
랩실에는 삼성에서 산학 협력으로 온 형님들도 있었다.
그분들이 가끔 말했다.
“너 삼성 가면 잘할 텐데.”
“그러게, 딱 삼성 스타일인데.”
그게 어떤 스타일인진 잘 몰랐지만,
듣기에 나쁘지 않았다.
누군가 나를 어떤 자리에 어울리는 사람이라 말해주는 건,
의외로 오랫동안 남는다.
내 지도교수님은 독설가였다.
어느 날 나의 발표를 듣다가 이렇게 말씀하셨다.
“넌 회사 가면 사람들이 진짜 좋아하겠다.”
"..."
“그렇게 일하면 다들 너를 쉽게 밟고 올라갈 수 있으니깐.”
그 말은
웃으면서 들을 수 있는 성격의 말은 아니었다.
지금도 그 순간이 머릿속에 선명하다.
결국 나는
진짜 날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그리고 내 스타일이라는 그 회사에 입사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20년을 보냈다.
지금도 가끔 생각한다.
그때 형이 기계과를 추천했더라면,
지도교수님이 조금만 덜 날카로웠다면,
나는 지금 어디쯤 서 있었을까.
인생은 계획보다 순간의 선택이 더 크게 작용할 때가 많다.
이상한 질문과 엉뚱한 대답이 길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지금,
내가 걸어온 길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와
그 안에서 쌓인 감정과 경험을
하나씩 꺼내어 보고 싶다.
다 지나온 것들이지만,
어쩌면 아직도
내 안 어딘가에서 이어지고 있는 이야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