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비가 해제되었습니다.’
오전 10시 20분. 가게 경비시스템을 해제시키고 들어간다. 밤새 뽀얗게 앉은 먼지가 들썩거린다. 주방과 홀의 전등 스위치 3개를 켜고 작업복으로 갈아입는다. 아, 이번에 새로 산 작업복은 좀 불편하다. 겨울용 도톰한 천으로 된 걸 샀는데 싸구려라 그런지 뻣뻣해서 움직일 때마다 거슬린다. 옷이 나를 찌르는 느낌마저 든다. 벗을까 잠시 생각했지만 이 옷이 지금의 나를 정의해주는 상징같은 거라 벗을 수 없다. 게다가 은근 멋진 작업복이거든. 익숙해지면 편해지겠지. 탁탁 옷을 털고 앞치마를 두른다. 오늘 하루도 다치지 않고 무사히 일을 마칠 수 있기를 바라며 주방으로 들어간다.
내가 하는 일은 사장이 출근하기 전에 미리 장사 준비를 해놓는 것이다. 음식을 파는 곳이니 주로 식재료를 손질하고 준비하는 일이 우선이다.
주방에 들어가 제일 먼저 밥을 안친다. 밥공기로 4번 퍼담은 쌀을 물에 다섯 번 헹군다. 오늘 밥은 적당히 잘 되면 좋겠다. 너무 질지도 않고 너무 꼬들거리지도 않게. 엄마는 늘 고소하고 윤기가 좔좔 흐르는 밥을 해줬는데 그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는 것을 이제야 알겠다. 주부 경력 10년이 넘어도 늘 들쑥날쑥이다. 밥을 안치는 게 이렇게 어려운 것이라니. 내가 생각해도 어이가 없다. 그래도 쌀을 씻고 안치는 이 작업으로 식당 종업원으로서 나의 하루를 시작하므로 야무지게 씻어본다.
취사 버튼을 누르고 나면 이제 양배추를 쳐야 한다. 돈가스와 함께 나가는 양배추는 되도록 짧게 치지 않으려고 한다. 손님들이 젓가락이나 포크로 집을 수 있을 만큼, 적당히 씹는 맛이 느껴지게끔 쳐야 한다. 처음에는 양배추를 치는 채칼이 익숙하지 않아 힘들었다. 칼날도 무섭고 사분의 일로 자른 양배추를 한 손으로 드는 것도 어려웠다. 그러나 모든 일은 할수록 실력이 늘어난다. 여러번의 시행착오 끝에 나만의 양배추 치는 방법을 터득했고 그로 인해 속도도 제법 빨라졌다. 단점이라고 하면 속도는 빨라졌지만 양배추를 치고 난 주변은 엉망진창이 된다는 것 뿐이다. 사장은 내가 양배추를 치고 난 자리를 보고 도대체 양배추를 어떻게 치는 거냐고 황당해 하지만 뭐 나는 괜찮다. 다 하고 얼른 치우면 되니까.(양배추 치는 기계도 있던데 사줄 거 아니면 그냥 놔두세요)
다음은 볶음밥 야채를 다듬을 시간. 우리 가게에서 볶음밥을 시키면 양상추, 치커리, 적채가 섞인 샐러드가 제공된다. 야채들을 하나하나 깨끗하게 씻고난 후 칼로 썰어 통에 담는다. 손님들 입에 들어갈 음식이니만큼 적당한 크기와 색감까지 고려한다. 이왕이면 먹기 좋고 보기 좋게 준비하면 좋지 않은가. 적채가 그 역할을 톡톡히 한다. 이야. 먹는 샐러드인데 눈이 호강하네.
사진 출처 unsplash
재료 준비하는 이 시간을 즐겨보기로 했다. 누구에게도 간섭받지 않는 나만의 시간. 조용히 뭔가를 새롭게 시작하는 느낌으로 경건하게.
혼자 있는 이 시간은 흩어졌던 생각들을 정리하기 좋더라. 아이들을 챙겨야 하는 정신없던 시간을 지나 오롯이 나에게 집중할 수 있는 이 시간이 참 귀하다.
이곳에서 일한지 벌써 3년차.
3년차 손에서 나오는 정확도와 스피드는 성취감 마저 준다. 타고난 덜렁이라 꼼꼼함이 약간 부족하지만 그래도 이만하면 많이 는 것 같아서 대견하다. 꽤 괜찮다.
고작 이런 일에서 성취감을 느낀다고 한심해 한적이 있다. 뭐 얼마나 대단한 일을 한다고 성취감을 운운한다니? 돈을 많이 버는 것도 아니고 남들 다 하는 일인데. 칫.
성스러운 노동의 가치를 깎아내리며 한없이 작아지던 나. 은연중에 육체노동을 무시하는 태도가 내 마음 속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었을테지.
그러나 일을 하면 할수록 점점 잘하고 싶어졌다. 내 손으로 준비한 음식들을 맛있게 먹는 손님들을 볼 때, 손이 많이 빨라졌다며 흘리듯 칭찬하는 사장의 말을 들을 때 내 마음은 더 잘하고 싶다는 욕망이 생겼다.
세상 불평불만은 다 하며 사는 사람이 그런 마음을 먹은 것이 낯설었지만 일을 할수록 '이왕이면 다홍치마'라는 뻔한 속담이 계속 생각이 났다. 이왕에 하는 일인데 잘해보자, 이왕에 하는 일인데 좀 더 신경쓰자라는 마음으로 나름의 방식와 노하우를 습득했다.
내가 긍정적인 사람이라서 그런 것이 아니다.
그저 정신승리가 필요했다. 여기서 일하는 나를 내가 불쌍하게 여기고 깎아내릴수록 손해보는 것은 나였다. 아이들에게 어떤 상황에서도 당당해야 한다며 화이팅을 외치는 엄마가 스스로를 하대한다는 건 말이 안되니까. 내가 나를 존중해야 한다. 내가 하는 일을 귀하게 여겨야 한다.
자신감이 필요한 시점이었다고 본다.
작은 성취감을 느끼며 내 존재를 확인하는 귀중한 경험이 필요했다.
그 출발점이 '재료 준비'이다.
좋아하는 노래를 흥얼거리며 사장도 아닌 내가 오늘 장사를 예측해본다. 오늘은 손님이 얼마나 올까? 준비한 만큼 팔리면 좋겠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새 오픈 시간이다. 가게 불을 전부 켜고 손님 맞을 준비를 한다. 첫 손님이 들어온다. 자! 시작이다.
누구보다 자신 있는 큰 목소리로 외친다.
“어서 오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