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완서 작가님 책은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만 읽어봤는데 작가님의 세밀한 풍경 묘사와 치밀한 기억들의 서술로 문장문장 압도당했던 기억이 난다.
내가 소화하지 못할만큼의 풍요로운 문장 구사력에 넉다운 되었다고나 할까.
그렇게 한 권의 책만 읽고 마음대로 작가님의 글을 판단한 후 내가 감히 읽을 수 있는 경지가 아니라고 여겼는데 어찌 또 이렇게 두번째 책을 읽고 있다.
앞에서부터 차례차례 읽다가 또 한 번 작가님의 엄청난 기억력에 기반한 특유의 빽빽한 서술에 질려버려서(작가님 글을 따라가다가 숨이 꼴딱 넘어갈 것 같은 느낌이었다고나 할까. 아... 아무도 모르겠지. 내가 말하는 이 느낌을...) 읽던 부분을 잠시 멈춰두고 이곳 저곳 책을 뒤적거리다 끌리는 제목이 보이면 읽는 것을 반복하는 중인데 갑자기 코 끝이 찡해지는 문장을 만났다.
"그러나 무슨 재주로 사람이 잡아먹은 세월을 토해 낼 수 있단 말인가.
나는 결코 세월을 토해 낼 수는 없으리란 걸, 다만 잊을 수 있을 뿐이란 걸 안다.
내 눈가에 나이테를 하나 남기고 올해는 갈 테고, 올해의 괴로움은 잊혀질 것이다."
내 눈가에 나이테를 하나 남기고...
세월을 토해 낼 수 없고...
다만 잊을 뿐이고...
그렇게 괴로움은 잊혀질거고...
아이들이 보고 있어서 엉엉 울지는 못했지만 또 혼자서 꼬 끝이 찡해서 훌쩍 거렸다.
흘러가는 세월을 잡을 수 없다는 걸 알고 있고, 괴로웠던 일들 또한 없앨 수 없는 노릇이고, 그럼에도 나는 살아가야 하는데 살기 위해 그저 잊기로 하는 것.
그냥 잊혀지는 것은 빚을 지는 것 같기에 내 눈가에 나이테 하나를 남겨놓는 것으로 그간의 괴로움을 탕감시켜 준다는 말로 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