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색 카메라

언젠가 전시가 될 나의 오늘들

by 헤레이스

스마트폰으로 찍은 사진들이 어느 순간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언제부터인가, 내 눈이 조금 고급스러워졌다.

아이들이 어느 정도 크고 나서야 나는 처음으로 ‘취미’라는 것을 가져보기로 했다.

다시 뜨개바늘과 실에 손을 댔고, 화초를 키우기 시작했다. 예쁘게 담고 싶었다.

그 무렵 유행처럼 번지던 미러리스 카메라를 구경하다가, 그렇게 과감하게 손에 쥔 것이 바로 Sony의 작은 카메라였다.


흰색 바디에 2430만 화소. 알파 5100.


셀카도 되고, 줌도 되고, 가볍게 들고 나가기 좋은 크기.



200만 화소 디지털카메라를 쓰던 내가 2430만 화소를 처음 만났을 때의 충격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세상이 이렇게 또렷했나 싶었고, 내가 보던 일상이 이렇게 많은 결을 가지고 있었나 싶었다.

처음에는 단렌즈 하나로 시작했다. 단렌즈 하나라도 마법을 부리듯이 찍히는 사진들.
발걸음보다 느린 초점, 손떨림과 실패 사진들, 흔들린 구도 속에서 나는 사진이라는 것을 조금씩 배웠다.


그러다 ‘삼식이 렌즈’라고 불리는 최적의 렌즈를 만나면서, 내 사진은 확실히 달라졌다.

이제는 누구 못지않게 멋진 사진들을, 아니 정확히 말하면 나다운 사진들을 나에게 안겨주는 카메라가 되었다.


내 일상 카메라는 지금은 단종되었다.
더 빠르고, 더 선명하고, 더 똑똑한 카메라들이 줄지어 등장했지만 나는 바꿀 생각이 없다.

손때가 묻어 칠이 벗겨졌고, 배터리 뚜껑은 헐거워져 수시로 열리지만...
이 모든 흔적은 내가 이 카메라와 함께 걸어온 시간이다.

익숙해진 것을 바꾸는 일은 생각보다 어렵다.


더 좋은 남편의 카메라 바디가 있음에도, 나는 여전히 내 카메라가 최고라며 고집을 부린다. 그리고 정말로, 이 작은 카메라로 나름의 최고의 사진들을 찍고 있다.

나는 카메라로 찍는 사진이 좋다.


스마트폰보다 한 박자 느린 셔터,
뷰파인더 대신 액정을 들여다보며 숨을 고르는 그 찰나,
사진을 찍기 전에 반드시 생기는 아주 짧은 ‘멈춤’.

그 멈춤 덕분에 나는 풍경을 더 오래 보고, 사람의 표정을 한 번 더 살핀다.


카메라는 단순히 기록하는 도구가 아니라, 내 시선을 천천히 만들어 주는 장치다.

그래서 내가 가는 곳 어디든, 나는 자연스럽게 카메라에 시선을 둔다.


빛이 좋은 오후, 아이들 뒤통수, 커피잔 위에 내려앉은 그림자, 잠깐 열린 창문 사이로 들어온 바람 같은 순간들.

이 카메라는 내 모든 작품들을 ‘작품 그 이상’으로 만들어 주었고, 내가 참 사진 잘 찍는다는 말을 처음 듣게 해 준 존재이기도 하다.


사진을 찍는다는 건,
순간을 붙잡는 일이 아니라
지나간 시간을 품는 일이라는 걸
이 카메라와 함께 알게 되었다.


언젠가는 작은 사진 전시회를 해보고 싶다.
거창하지 않아도 좋다.
내가 살아온 계절들과 아이들의 성장,
그리고 나 자신을 바라보던 수많은 시선들을 벽에 걸어두는 일.


내게 카메라는 기다림을 배우게 해 준 또 하나의 방식이었다.

셔터를 누르기 전,
조금 더 바라보고
조금 더 느끼고
조금 더 숨을 고르게 만드는 것.


아마 그래서일 것이다.
나는 아직도 이 오래된 흰색 카메라를 놓지 못한다.

이 카메라는 내 일상을 찍었고, 나는 이 카메라로 나를 찍었다.





그리고 그 모든 시간 위에, 지금의 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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