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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곰미곰미 Oct 27. 2023

할머니의 전쟁(?)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

요즘 할머니는 심기가 많이 언짢으시다.

며칠 전 아침에 문을 열고 들어서는데 할머니는 스피커폰으로 통화를 하고 계셨다.

스피커 폰으로 들려오는 소리를 통해 따님이시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조용히 눈인사를 하고 부엌으로 가서 설거지를 먼저 했다.

할머니의 통화는 꽤 오랫동안 이어졌다.

중간중간 소리가 높아지기도 하고 허허하며 기가차다는 듯이 웃으시는 소리도 들렸다.

따님이 뭐라 뭐라 한참을 얘기하니

그래 너 잘났다라며 비꼬기도 하시고 내가 얼마나 고생해서 키웠는데 네가 지금 그런 소릴 다하냐며 약간 언성을 높이기도 하셨다.


통화 중이라 청소기도 돌리지 못해 좁은 거실을 밀대로 몇 번을 오가며  닦았다. 그러는 동안에도 통화가 끝나지 않아 거실 소파에서 빨래를 정리하며  통화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간간이 들려오는 소리를 들어보니 따님이 오랜만에 통화를 하며 힘들었던 이야기를 했는데 엄마로부터 위로는 커녕 듣기 힘든 소리에 남편까지 무능하다는 욕을 먹고 손녀딸 성격이 별스러운 게 딱 널 닮아 그렇다고 얘기하시니  딸이 엄마한테 다시는  속상하고 힘든 얘기 안 할 거라며 얘기했고, 나중에는 경제적인 문제에 대한 얘기도 오고 가는듯 하더니 결국 딸이 당분간 전화를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전화를 끊었다.


할머니도 속상하셔서 어이없다는 듯 한숨을 쉬시기도 하시고 고약한 것이라며 툴툴거리듯 험담을 하셨다.

그러기를 한참 하시더니 나중에는 얼굴 표정이 점점 어두워지고 멍한 표정으로 바닥을 바라보기도 하셨다.

무슨 일인지 자세히 여쭈어 볼 수없어서 그냥 할머니가  역정내시며 내뱉으시는 말에

그래요? 그래요? 아이고… 왜 그럴까요? 하며 추임새만 더할 뿐이었다.


할머니는 87년도에 처음으로 이민을 오셨다.

한국에서 해방둥이로 유모도 있는 부잣집에서 태어나 6.25 전쟁통에 피난살이도 경험해 보시고

어려운 시기도 지내보셨지만  결혼하기 전까진 큰 어려움 없이 잘 지내셨다고 했다.


군인이었던 가난한 남편을 만나 반대하는 결혼 해서 살다가 미국에 있는 시누이가 초정해서  

이민을 왔다고 했다.


미국에서 공부를 시작한 남편을 대신하여 처음 직장 다녔던 얘기도 해주셨다. 

보석가게에 취직을 해서 아주 장사를 잘했다고 그때 모은 돈으로 엘에이 근교 노스리지에 큰집을 샀다고 했다.

따님이 미국에 온 지 2년도 안 돼서  소위말하는 명문대에 입학을 하니 한국에서 지인을 통해 소문을 듣고 알음알음 계속 문의가 왔다고 했다.

자녀들을 유학 보내고 싶으니 좀 봐주면 좋겠다고 해서 당시 방만해도 6개로 집도 크고 하니 그때 홈스테이를  시작했다고 했다.

부유한 집에서 유학 보내고 싶어 하는 사고뭉치 자제들을 안심하고 맡길 수 있으니 돈도 아주 잘 벌었다고 했다.


그렇게 몇 년을 잘 지내고 있었는데 지진이 나서 집이 무너져 내렸다고 했다.

밤에 자는데 우르르 쾅하는 소리가 들리고 땅이 흔들리면서 두 분이 침대 양옆으로 떨어졌고,

동시에 벽에 서있던 장들이 엎어지면서 머리를 쳐서 그대로 기절하셨다고 했다.

기절하신 할머니를 남편께서 안고 뒤뜰로 겨우 빠져나왔는데 정신이 들며 수영장물이 파도처럼 넘실대는 것을 봤다고 했다.

그때의 충격으로 오랫동안 신경약을 먹고 있는 거라고도 하셨다. 그래서 지금도 큰  소리를 들으면

머리가 아프다고 싫어하시고 큰 청소기를 돌릴 때면 밖에 나가서 잠깐 산책을 하고 오신다.

미국 와서 정착하고 살만하니 다 잃었다고 남편 되시는 할아버지는 그때의 괴로움을 어쩌지 못해

 가끔 술을 드시고 울기도 했다고 했다.


한국에서 큰 사업을 하기도 해서 장사 수완이 좋으신 할머니는 그 틈에도  돈이 될만한 것이 보여서 지진으로 무너진 지역의 집값이  바닥을 찍고 떨어질 때 그 집들을 아주 싸게 매입해서 수리한 후에  다시 되팔아 돈을 모으기 시작했다고 하셨다. 그리고 나중에는 그 일을 전문적으로 오랫동안 하셨다고 했다.

그렇게 두 자녀를 명문대를 보내고 졸업까지 시킬 수 있었다고 했다.


오래전에 할머니는 유방암도 이겨내셨다.

수술도 하시고 그 독한 항암치료를 견뎌내시고

완치판정을 받으셨다.

그래서 할머니는 가슴 한쪽이 없으시다.

암투병을 하실 때 할머니는 당연히 당신이 먼저 가실 거라고 그때 묘지를 사놓았다고 했다.

그런데 그 자리에 자신이 아닌 남편이 먼저 가버렸다고…

할머니는 가끔 벽에 걸린 사진을 보며 5년 전에 먼저 가신 남편에게 원망하듯 중얼거리기도 하신다.

내가  먼저 갈려고 준비해 둔 자리에 어찌 당신이 먼저 가셨냐며 야속한 원망을 한숨과 함께 내뱉는다.


사별 후 4~5년째가 제일 힘들다는 얘기를 들었던 기억이 있는데 정말 그런가 싶다.

내게도 가끔 너는 신랑 있어 좋겠다는 얘기를 농담처럼 하시는데 그 말에 진심이 묻어있는 게

느껴지니 말이다.  가끔 산책하다 마주치는 주위에 사시는 노부부를 보면 반갑게 인사하시지만

이내 돌아서서 입을 삐죽거리시는 것도 본 적이 있다. 부러움이 섞인 투정인 듯했다.


부잣집에서 귀하게 자라서인지  자기중심적인 성향도 보이고 자존심도 강하시고 옛날 우리네 부모님 세대가 그러하듯이 체면이 중요하고 그래서 아직은 자식에 대한 맘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를 잘 모르시는 듯하다.


따님의 속상한 투정을 듣다 보니 그 딸의 속상함이 전이가 되어 대신 손녀와 사위에게 화를 내준다는 것이 그만 따님의 마음만 더 상하게 하는 꼴이 되어버렸으니... 할머니는 그게 얼마나 괘심하고 야속하셨을까?

더군다나 남편까지 잃은 서글픔에 외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는데  지 남편 욕 좀 했기로

내 가정이 더 중요하다며 당분간 전화하지 않겠다는 딸의 말이 얼마나 기가차고 서운하셨을까?


할머니도 이해가 가지만 한편으로 그 따님도 이해가 되기에 두 사람의 마음 사이 어디쯤에서

내 맘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


빨리 이 전쟁이 끝나길.... 할머니의 한숨이 잦아들길...

그리고 할머니께서 오늘밤은 수면제 없이도 잠들 수 있길 기도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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