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순천까지 떠내려왔는지는 구구하니 생략하고 잠시 후 하동행 무궁화호를 탈 것이라는 정도로만 오늘의 내 행적을 밝힌다.
다만 멀리도 이리도 멀리 흘러 내려오니, 집과의 거리만큼 딱 그만큼 마음의 평안을 얻는다. 어쩌면 이 정도는 흘러 내려와야 할 산란함이 있었기에 지금 나는 순천이고 또 하동을 가려하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왜 익숙한 것에 머무르지 못하고 낯선 것에서 안정을 얻는 것인지, 마음의 안정을 얻는 낯선 곳에서 늘 몸은 피곤하구나.
‘국립’이란 단어가 앞에 붙는, 2년간의 학비와 생활을 제공받고 졸업 후 나라를 위한 봉사(?)라는 대가를 치르는 대학을 다니는 동안, 상대적으로 불행의 서사를 가진 친구들의 많았고 스무 살의 서툰 술자리의 끝은 가끔 누구의 생이 더 불행했는가 하는 배틀이 벌어지곤 했단다. 무슨 마음이었을까 불행을 대결하던 그때의 젊음은.
너의 ‘자랑스러운 불행’에 대한 ‘무례한’ 글을 읽으며 잠시 오래된 나의 승부욕이 올라와 ‘자, 어떻습니까’라고 묻는 건방진 너를 깔아뭉개 버릴 만한 나의 ‘위대한 불행’의 역사를 뱉어내려다
‘환한 낮’을 사는 너의 시간을 따라가진 못하지만 ‘어둠이 걷혀가는 새벽’ 즈음에 살고 있는 나를 생각하니 나의 ‘위대한 불행’의 역사는 여명처럼 맥없이 흩어져 버렸다.
어느 순간 과거란 현재의 편입된 기억에 불과함, 현재의 나는 모든 과거의 흔적들이 켜켜이 쌓여 만들어졌음을 어느 하나의 변수라도 작용했다면 지금과는 다른 나일 것임을 자각한 순간, 항상 생각해 보곤 한다.
‘나는 지금의 내가 좋은가?’
그 대답이 ‘YES’라면 나의 모든 과거는 소중한 것이 된다. 그리고 다행히 지금까지 나의 자답은 항상 ‘YES’.
새벽에서 환한 낮을 향해 그리고 저녁노을을, 평안한 밤을 맞이하겠지만 그때까지 항상 나의 지금은 좋을 것이고 살아지고 있는 나의 과거는 모두 소중할 것 임을.
너의 것과 같은 ‘견고함’은 아닐지라도 나도 믿는단다. 나를 그리고 너를.
그리하여 너의 무례한 글은 나에게 ‘레토르트 정도의 위로’ 따위도 되지 못했지만 ‘자극’은 되었구나. 너의 밝고 찬란한 낮에 대한 ‘극심한 질투’라는 자극.
그러니 기다려라, 빠르게 달려가 너와 같은 찬란하고 밝은 낮을 함께 할 테니.
순천만 칠게빵이 맛있을까, 저걸 사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고민하며, 나도 너의 건승을 심심히 기원한다.
어젯밤 글을 쓰는 동생에게 전송되어 온 글을 읽고는 심란한 마음에 늦게까지 뒤척거렸다. 마치 나에게 보내는 편지 같은 생각이 들어 순천에 도착하고 커피를 들이켜고 몽롱한 정신을 조금 가다듬은 뒤, 답장인지 독백인지 모를 글을 써 내려갔다.
글을 마치고 조금은 후련한 마음으로 식은 커피를 홀짝이다 보니, 몇 분 후로 다가온 출발시간, 허겁지겁 짐을 챙겨 플랫폼으로 향한다.
내가 탈 기차는 부전행 무궁화호. 나는 하동에서 내릴 것이다. 잠시 후 플랫폼으로 기차가 들어서고 기차는 단 두 칸.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사람들이 두 칸의 범위 안으로 모여들자 꽤나 북적이는 모양새가 연출된다.
부전행 무궁화호는 호남과 영남을 잇는다. 점점 지역 간의 감정과 거리보다는 계층 간의 거리가 더 멀어지는 흐름이지만, 오랜 두 지역의 ‘멀음’은 둘 사이를 잇는 기차의 ‘적음’으로 증명되는 듯하다.
자리를 찾아 앉고 잠시 멍하니 창 밖 풍경을 바라본다. 산맥이 많은지 터널이 잦다. 터널에 진입할 때의 기차는 소리도 풍경도 모두 달라, 잠시 시공간을 넘나드는 듯하다. 까만 차창과 ‘왱’하는 터널 속 굉음 속에서 가만히 하동, 하동...하고 되뇌어 본다.
왜인지 익숙한 지명이다. ‘내가 ‘하동’을 가본 적이 있었던가 ‘ 영화 박하사탕의 한 장면처럼 과거를 더듬더듬 더듬어 간다. 아득히 먼 젊은 날, ’ 매화꽃 축제를 보러 왔던 곳이 이곳인가’ 하다가 섬진강 하동 십리 벚꽃길이 워낙 유명해 익숙한가 보다 하고 상념을 접으려는 순간, 문득 떠오른 ‘강원도 영월군 하동면 주문리’라는 지명.
내가 태어난 곳. 결혼을 하고 호적이 바뀌기 전까지. 본적을 적어내야 할 때면 항상 되뇌던 ‘하동면’
아, 살아온 시간만큼 까마득히 잊고 있었구나. 하지만 어쩌면 태어나 살아감이 지속되듯이 결코 잊을 수 없는 지명일지도 모르겠다. 비록 지금은 ‘김삿갓면’으로 바뀌어 흔적조차 사라졌지만, 내가 태어난 곳은 앞으로도 ‘하동면 주문리’ 일 것이다, 까무룩 잊었다가 불현듯 생각나는.
이런 생각을 하자, 마치 없어진 고향의 흔적을 찾는 듯 하동을 향하는 나의 시간이 조금 더 특별해진다.
곧 하동에 도착한다는 방송에 감상이 잔뜩 묻은 상념을 털어내고 창밖을 바라보자 파란 하늘과 뭉실뭉실 구름들, 그 아래 강물과 노오란 들녘까지 너무나 선명해 비현실적인 가을 풍경이 보인다.
‘아 이곳이 하동이구나’
하동의 첫 풍경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듯 작지만, 높은 천장이 시원한 깔끔한 건물이다. 여느 작은 역이 모두 그러하듯 목적지가 분명치 않은 사람은 별로 없는 듯 나와 함께 내려선 이들은 바쁜 걸음으로 각자의 걸음을 향하고 덩그러니 혼자 남았다. 화장실을 다녀오고 짐을 추스른다. 이곳에서 잠시 시간을 보낸 후 남원을 향하기로 되어 있어 짐이 어수선하다. 짐을 좀 맡길 곳이 있으면 좋을 텐데 생각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은 그저 빨리 흘러 보내야 할 뿐. 지도를 살피니 하동읍까지는 2킬로미터 남짓. 차를 이용하면 너무 짧고 걷기엔 너무 길다. 9월의 뙤약볕이 조금 망설여지지만, 이내 짐을 추스르고 양산을 펼쳐 들고는 역사 밖으로 나선다.
하동역
선명한 파란색과 흰색이 조화롭게 펼쳐진 전형적인, 전형적이기에 기분을 들뜨게 하는 하늘을 바라보며 길가마다 주렁이는 호박, 간들거리는 코스모스, 낯선 침입자의 발걸음에 놀라 펄덕이는 메뚜기, 그렇게 가을이 흐드러진 논둑길을 신나게 걷는다.
저 멀리 시내인듯한 곳이 보이고, 주택과 상가가 여유롭게 자리하고 있는 길에 들어서자, 마을 전체가 가을운동회 중인가 싶게 만국기가 펄럭인다. 어릴 적 운동회의 풍경을 기억나게 하는 만국기는 항상 마음을 들뜨게 만든다.
곳곳마다 제자리를 지키고는 있지만, 빨갛고 파란불을 점멸시키는 제 할 일은 다 내려놨다는 듯 다만 노란 불을 깜빡이고 있는 신호가 보여주듯 거리는 사람과 차 모두로부터 한산하다.
그렇게 30분쯤 걷자 화개장터가 나타났다.
점점 요즘의 일에는 흐릿하니 멀어지고 있어 요즘의 일은 알 수 없지만,
‘전라도와 경상도를 가로지르는 섬진강 줄기 따라 화개장터엔, 아랫마을 하동 사람, 윗마을 구례 사람 닷새마다 어우러져 장터 펼치네~’
란 노래로 나에겐 꽤나 유명한 곳으로 기억되는 곳이건만, 화려한 만국기의 그림자 아래 장터는 쓸쓸하다.
장날엔 사람들의 발길로 북적일까?_오일장은 지금은 없어졌다고 한다_
섬진강 십리 벚꽃길이 펼쳐질 봄날의 시끌벅적할 장터를 상상하며 장터를 한 바퀴 돌고 나니 늦어진 첫 끼니의 시장이 몰아친다.
시장 안 식당에서 요기를 할까 하다. 풀 죽은 장터거리에 식욕도 꺼져버려 나무 그늘 아래 앉아 지도를 들여다보고 섬진강을 따라 역으로 되돌아가기로 마음먹고 그 근처 재첩으로 유명한 식당들이 있는 곳으로 향한다.
재첩 음식을 대표로 하는 식당 서너 곳이 줄지어 있다. 그중 한 곳은 ‘맛있는녀석들’에 나온 유명 맛집인 듯하고 나머지 식당들도 각각 방송 출연 경력을 내세우고 있었는데, 그중 가장 유명하지 않아 보이는 곳을 골라 문을 열고 들어간다. 주류에 있고자 하는 마음보단 항상 빗겨 있고 싶어 하는 마음이 더 큰 듯하다.
오후 세시가 좀 넘은 시간, 식사 시간을 한참 비껴가 있다 보니 식당 안은 비어있다. 식사가 가능한지 조심스레 여쭤보니, 들어오시라며 반갑게 맞이해주신다.
혼자가 괜스레 미안한 마음과 늦은 만큼 제대로 먹고 싶은 마음에 과함을 뻔히 알면서도 재첩 정식과 함께 막걸리와 재첩전을 주문한다. 잠시 후 맛깔스러운 십여 가지 찬들이 깔리고 재첩국과 밥, 화개장터 막걸리와 재첩이 가득한 전으로 푸짐한 한 상이 차려진다.
막걸리를 흔들어 한 잔 가득 따라 들이켠다. 내 입맛에 다소 달짝하지만 가을 한낮의 오랜 여정에 따른 피로와 시장을 가시기에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두 잔의 막걸리와 전으로 급한 허기를 잠재우고 뽀얀 국물의 재첩국을 맛본다. 비릿함은 없고 시원함만 남아있다.
찬들은 전라의 살가운 맛을 경상의 무뚝뚝함으로 애써 덮고 있는 듯하다. 찰기가 가득한 밥에 찬들을 얹어 반찬으로 삼아 남은 막걸리를 천천히 비워내고 식어도 여전히 깔끔하고 시원한 재첩국으로 마무리한다.
밥에, 전에, 막걸리까지 탄수화물로 채운 배는 든든하고, 은은한 취기에 기분도 든든하다.
강변 쪽으로 방향을 가늠하고 천천히 걷다 보니 눈앞에 너른 소나무 숲과 그보다 더 너른 섬진강이 펼쳐진다.
소나무 숲 그늘 아랜 소풍을 나온 사람들로 가득하고 반짝이는 빛으로 가득 찬 섬진강 모래사장은 강의 빛을 사진 속에 담아 남기려는 사람들의 발길로 바쁘다. 사람이 아름다운 풍경이다.
조잘대며 주위를 뛰어다니는 아이와 그런 아이를 눈으로 좇으며 벤치에 누워 잠시 일상의 피로를 내려놓고 있는 아빠의 모습이 보인다.
나도 그 옆 벤치에 머리를 기대고 누워 그저 느리게 흐르는 섬진강을 바라보며 생의 숨을 가다듬는다.
얼마나 지났을까, 늘어진 시간을 다시 당겨 잡고 강변을 곁에 두고 역으로 향한다.
섬진강의 느긋함에 휘말려서일까, 문득 남은 거리와 시간을 계산하니 자칫 기차를 놓칠 수도 있겠다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