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수 좋은 날

어느 하루의 기록

by 하란

지난 주말, 한글날이 끼어 월요일까지 연장된 연휴 동안 말하자면 입만 아프게 잡스러운, 하지만 상당히 신경을 갉아먹는 일들로 심신을 소모시키고 그 탓인지 십여 년 정도는 잠잠하던 가위눌림에 밤새 시달리느라 잠을 설쳐 몹시도 피곤하던 화요일이 바로 어제.

전날 거의 잠을 이루지 못했음에도 어찌어찌 몸을 움직이긴 하지만 생산적인 일이라곤 하나도 하지 못한 채 그저 유튜브를 틀어 요즘 인기 있는 연애 프로그램을 멍하니 찾아보며 시간을 보낸다.

이 정도면 졸릴 법도 하건만 피곤한 건 마음뿐인 건지 12시는 가볍게 넘겨 버리고 그래도 2시 즈음 유튜브의 쇼츠 영상의 반복 재생되는 소리를 들으며 어느 순간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그리곤 그렇지 않아도 험난한 밤잠을 괴롭히던 가위눌림 없이 눈이 반짝 떠진 건 5시경. 꽤 추워진 날씨에 이불속에서 꼼지락대다가 그래도 지난 며칠보단 상대적인 개운함에 이불을 떨치고 일어나 무슨 바람인지 지난 몇 달간은 게을러져하지 못하던 스트레칭을 하고 일어났다.

6시를 갓 넘긴 시간이 어둑어둑하게 어느새 계절은 흘렀다

생산적인 일을 하나 적립해서인지 스트레칭을 끝낸 몸보단 마음이 더 개운해졌고, 아직 채 가시지 않은 어둠 속에서 골프연습장을 향하는 그야말로 나에겐 미라클 모닝이 이어졌다.

하다 말다를 반복하다, 이사를 오며 먼지가 쌓여 있는 골프클럽을 보고 이번에야말로! 끝장을 보리라는 비장한 각오로 새롭게 시작한 골프는 비싼, 말 그대로 백수 주제에 오지게 비싼 레슨 비용까지 들여 고군분투했지만 실력은 퇴행을 거듭해 비거리란 건 말 그대로 거리가 나지 않는 非거리인 것인가라는 자조 섞인 농담을 스스로에게 하기에 이르러 있었는데, 오늘은 갑자기 부처가 깨달음을 얻듯 공이 맞는 소리가 다르더니, 80미터 정도에서 시작해 차츰차츰 뒷걸음질 쳐 70미터에 이르던 아이언 샷이 갑자기 쭉 쭉 나가더니 100미터를 찍는 게 아닌가!!

혹시나 잠시의 요행이 될까 싶어 그날의 연습기록을 100미터로 급하게 마무리 짓고 어느새 밝아진 거리를 그 보다 조금 더 밝은 기분과 가벼운 걸음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도착하니 가기 전 눌러 놓은 밥통의 밥은 알맞게 지어져 있었고, 아이들이 먹고 싶다는 계란찜과 이런저런 찬들로 아침 밥상을 차려 주었다. 매번 똑같이 만들던 계란찜 이건만 오늘은 더 맛있다네 또?!

여하튼, 이렇게 활기차게 시작된 나의 미라클 모닝을 미라클 데이로 바꾸기 위해 오늘은 무얼 할까 하다 생산적인 일과 기분 좋음의 콜라보를 할 수 있는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 함께 글을 쓰자는 약속’을 잡아 놓고는 매일 오전의 루틴을 오늘은 괜히 특별히 더 근면 성실한 사람인 듯해나간다.

설거지를 하고, 빨래를 돌리고, 쓰레기를 버리고, 청소를 하고, 샤워를 하고 이미 나의 계획적인 루틴 안에서는 당연하게도 머리를 말리고 나니 세탁이 끝난 빨래를 널고. 가벼운 화장과 함께 오늘은 특별히 더 좋아하는 옷을 입고 노트북과 책을 챙겨 차에 오른다.

요즘 즐겨 듣는 ‘비비’의 노래를 우퍼 빵빵한 카 오디로 로 들으며 미라클 데이를 사는 사람으로서 오늘의 해야 할 일들을 머릿속으로 계획 정리하며 약속 소를 향해 차를 몰던 중 갑자기 슬로비디오의 한 장면처럼 떠오르는 한 장면.

마트에 가서 매장으로 들어가기 전 현금입출금기가 보이고, 현금을 좀 뽑아 놓을까 생각을 하며 오만 원권 6장을 출금해 그날 길거리에서 받은 부동산 카탈로그 속에 끼우는 어제의 나.

그리고 가방에서 책을 꺼내 담으며 카탈로그를 꺼내 재활용 쓰레기통에 담는, 그리고 바로 쓰레기를 버리는 근면 성실한 오늘의 나.

오우 쉣! 차를 돌려 집으로 향한다. 오 분 거리가 무색하게 길고 머나멀다. 차를 대고 시동을 끌 여유도 없이 내려 재활용 쓰레기를 뒤지기 시작한다.

일분, 오분, 십분 시간이 지날수록 폐지가 쌓인 통은 비어 가고 그만큼의 절망이 내 안으로 차곡차곡 이체된다. 함께 버린 것들은 다 발굴을 해내었건만, 목적한 것은 도통 보이지 않는다. 이 정도면 누군가가 가지고 갔다는 것이, 고로 찾을 가망이 없다는 것이 어느 정도 확정된 듯 하지만 다만 포기할 수 없어 거의 비어버린 통을 뒤적이고 있으니, 경비아저씨께서 다가오신다. 안 그래도 뼈 아픈 마음은 이런저런 걱정 어린 첨언으로 한 번 더 쓰라리게 후벼지고, 이제는 더 봐봐야 없다는 아저씨의 확인을 듣고 나서야 밖으로 빼어둔 종이들은 다시 집어넣으며 마음을 정리한다.

재활용쓰레기장 뒤로 보이는 가을은 그저 아름답다

다시금 미라클 데이_그 순간은 정말 놀랄만한 하루가 된_를 이어가기 위해 다시 약속 장소를 향하며 잃어버린, 아마도 누군가의 호주머니 속에 있을 30만 원에 대해 생각이 이어지고 상념은 세 가지로 정리된다.

하나. 다소 심해진 듯한 건망증, 술을 너무 마셔서 그런가? 술을 끊어야 하나.

둘. 지난주부터 소박한 삶을 살겠다며 돈을 아껴 쓰기 시작했는데, 아무 의미 없는 것 아닌가. 어차피 돈이란 건 나의 의지가 아닌 지 뜻대로 오고 가는 거 아닌가. 그러니 돈의 맘이 돌아서 가버리기 전에 맘껏 써버릴까? 잃어버린 돈의 10배 정도 쓰면 이 속 쓰림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진 않을까?

셋. 지난주부터 아낀 돈이 최소 10만 원은 되지 않을까? 2주일만 더 아끼면 그것으로 상실은 상실되지 않을까?

첫 번째 상념은 나의 최대이자 최애 유흥인 술을 포기할 수 없다는 마음이 작용했을 여지가 있지만 난 25년 전부터 술을 마셔왔고 요즘은 더욱이 아주 건전한 술자리를 영위하고 있잖아, 다소 심해진 건망증은 정상적인(?) 노화의 증거일 뿐, 얼마 전 시작한 사천성 게임에 더욱 매진해 뇌의 노화를 늦추자로 빠르게 마무리되고 2번과 3번 사이에서 그저 왔다 갔다 한다.

김첨지의 운수 좋은 날은, 마누라의 죽음으로 끝이 났으니, 나의 운수 좋은 날도 이것으로 끝이겠구나. 더는 기쁨도 불행도 없으리라고 스스로를 자위하며 글을 쓰는 지금, 앞에 앉은 내 좋은 사람의 얼굴을 한 번 쳐다 보니 잔잔한 즐거움이 퐁퐁 샘솟는다.

바라만 봐도 즐거움이 퐁퐁 솟아나는 내 좋은 사람

그 일로 되돌아가지 않았다면 큰 사고가 났을 수도 있다는 신포도에서부터 혹여 그 돈을 가져갔을 누군가가 기쁘면 되었다는 성인군자적 위안을 하다 오늘 어둔 저녁 길가다 콱 자빠져 임플란트 비용이 3백 나와버려라는 인간적인 나로 되돌아오길 반복하며, 지난주 사둔 로또를 생각해 내곤 혹시나 하며 번호를 맞춰 본다.

에라이 꽝!

그까이꺼 삼십쯤!은 하고 생각하게 만들어 버리는 오늘의 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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