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생각해도 그 정도의 스트레스 거리는 아닌데, 살짝 균열이 오나 싶던 마음은 순식간에 쩍쩍 갈라져 무너지고 말았다.
약한 것엔 민감해지기 마련이라, 약간의 균열을 느끼곤 빽빽하게 짜놓았던 일주일의 여행 일정을 재빨리 모두 취소하고 가만히 나를 숨겨두었는데, 고약스럽도록 질긴 우울은 금세 나를 찾아내 단숨에 집어삼켰다.
깊은 밤, 끊임없이 흐르는 눈물과 그로 인해 깨질듯한 머리, 무엇에 대한 것인지도 모를 자책과 원망, 불안들.
어느 순간 호흡이 좀 가빠짐을 느끼고는 덜컥 겁이 났다. ‘숨을 쉰다’는 게, 그 당연한 일이 어려워지면 다시는 되돌릴 수 없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그 순간 내가 가진 모든 이성을 그러모아 나를 다독여 봤지만 무너진 마음에 두려움까지 깃들어 상황은 점점 안 좋게 나를 몰고 가는 듯했다.
‘안 되겠구나.’
오랜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누구에게든 폐를 끼치기가 죽기보다 싫어 받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과 어둠 속 마지막 불빛인 듯 제발 받아줬으면 하는 마음이 교차한 상태로 휴대폰 속 흘러나오는 음악을 가만히 듣고 있었다.
베토벤의 것인지, 모차르트의 것인지 모를 어느 피아노 소나타를 듣다 보니 조금 진정이 되는 것도 같아 전화를 끊으려는 순간 잠이 덜 깬 목소리가 들렸다.
울음을 삼키고 지금 나의 상태와 내가 생각하는 원인을 가능한 제삼자의 이야기처럼 담담히 하려고 노력하는데, ‘괜찮아?’란 한 마디에 툭, 온몸으로 막고 있던 뚝이 터져버렸다.
원래도 누군가를 다정스레 위로하는 일엔 전혀 소질이 없는 친구는, 소름이 끼칠 법도 한 나의 한밤의 울음을 한참 동안 가만히 듣고 있다가 말했다.
‘향일암에 가고 싶네.’
‘응? 뭐? 향일암? 여수?’
‘응, 갑자기 생각이 나네.’
갑작스러운 얘기에 끊임없이 계속될 것 같던 울음도 멈췄다. 잠시의 침묵 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헛’하고 실소를 토했다.
‘갈까?’
이미 코레일앱을 열어 여수행 기차 시간을 확인하고 있던 나.
‘다섯 시 반이랑 일곱 시 반’
‘지금 준비하면 다섯 시 반 기차 탈 수 있겠다’
전화를 끊고 세수를 하고, 책 몇 권을 가방에 챙겨 넣고 차키를 집어 들고 집을 나섰다.
차를 타 백미러를 보니 눈이 퉁퉁 부어있다.
‘사진은 못 찍겠네.’
나를 삼켜버릴 듯했던 한 시간 전이 아득히 느껴진다. 이런 내가 어이없기도 하고, 삶이란 게 때론 농담 같기도 하구나 하며 저 멀리 반달이 떠있는 새벽길을 달려 광명역으로 향했다.
차를 주차하고 역사로 들어가니 사람들이 꽤 많다. 아마도 서울이나 대전쯤으로 출퇴근을 하는 사람들이거나, 출장 혹은 그 무슨 일로 새벽 기차를 타는 사람들이겠거니 싶다.
편의점에서 난 따뜻한 커피를 친구는 전날의 숙취가 가시지 않는다며 헛개수를 골라 사들고 기차를 탔다.
시간대가 시간대인지라, 모두들 아마도 아쉬웠을 잠을 보충하고 있다. 각자 이어폰을 끼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잠으로 빠져들었다. 익산과 여천역에서 한 번씩 잠에서 깨어 시시각각 밝아지는 아침을 확인하다 보니 기차의 종착역이란 방송이 흘러나온다.
열차에서 내려 대합실로 가다 보니 종착역임을 확인해 주듯 기차의 머리 바로 앞에서 길은 멈춰있다.
아, 이제 기차는 제 길을 끝내고 쉬겠구나.
커다란 조형물들이 놓인 여수엑스포장을 가로질러 검색해 둔 식당으로 향했다.
화려한 모습의 역과 엑스포장과는 대비되게 역전앞으로 늘어선 식당들의 모습은 빛이 바래 있고 지방의 여느 거리가 그러하듯 다소 쇠락해 있었다.
오래되고, 그래서 낡고 다소 쇠락해 가는, 하지만 그만큼의 시간과 그만큼이 이야기를 가진 내가 좋아하는 풍경이다.
아침 식사로는 다소 무거운 듯하지만, 먹성이 좋은 친구에게 고마운 마음을 담아 장어탕 정식을 시킨다. 이제 막 문을 여신 듯 연신 가게가 추워 어쩌냐 걱정하시는 주인아주머니. 꽤 먼 거리의 북쪽에서 내려온 우리에게 여수의 새벽 날씨는 포근하기만 해, 하나도 춥지 않다고 괜찮다고 안심시켜 드린다.
‘금방 차려 드릴게잉’
금세 여러 가지 찬들로 한 상이 차려진다. 장어탕에 인당 4천 원을 더해 간장 돌게장과 양념 돌게장이 포함된 정식이다.
갓김치는 너무도 당연하게(여수니깐 훗) 톡 쏘는 맛이 일품이고 계란을 묻혀 부쳐낸 두부, 간장 양념을 올린 피꼬막, 슴슴하게 무쳐낸 콩나물과 시금치, 깔끔한 오이피클과 스댕그릇에 푸짐하게 담아 내주시는 게장은 짜지 않은데도 감칠맛이 좋아 자꾸만 자꾸만 밥을 비우게 만들었다.
_게장은 1회 리필 가능하다고 하시는데, 내주시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_
장어탕은 장어가 듬뿍 들어가 있는 진한 국물에 숙주를 넣고 들깨가루를 풀어 구수하고 얼큰해 각자의 이유로 지친 속을 따듯하게 풀어주었다.
오동도의 방풍나물과 맑은 물로 빚었다는 방풍 막걸리는 깔끔하고 맑은 맛이 꽤나 좋았는데, 푸짐한 밥반찬에 매료된 나머지 다소 찬밥 신세가 되었지만 담에는 메인 주인공으로 한 번 모셔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약간은 과하다 싶게 배를 채우고 향일암으로 가기 위해 버스정류장으로 갔다. 바로 가는 버스는 111번이 거의 유일한데 배차 간격도 거의 한 시간인 데다 네이버지도앱에 도착 예정 정보도 뜨지 않아 좀 조바심이 났다. 다시 한번 조회를 해보니 삼십 분 전까지 여기서 타라고 안내했었는데, 지금은 7백 미터쯤 떨어진 정류장에서 타라고 안내가 돼있다. 혹시나 싶어 급하게 자리를 옮겨 기다리다 10시쯤 무사히 버스에 올랐다.
_아침의 몇 대만 엑스포역을 경유하기 때문에 노선이 좀 달라 확인이 필요하다_
여수의 기사님들도 저 반대편 바닷가 부산의 기사님들에 못지않게 화끈한 운전실력을 보여주셨다. 이리저리 흔들리고 덜컹대며 간간이 나타나는 바다 풍경에 감탄하다 창에 머리를 부딪혀가며 졸다 보니 어느새 종점, 향일암 앞에 도착했다.
가파른 길을 따라 향일암 입구로 걸어가는 길, 양쪽 옆으로 늘어선 가게마다 갓김치, 총각김치, 파김치 등 맛깔스런 김치를 늘어놓고 막걸리 한잔하고 가라며 이끄신다.
부른 배가 아니었다면 분명 유혹에 못 이겨, 막걸리 잔을 기울이다 향일암 계단도 못 보고 왔을 것이 분명하다.
향일암 입구에서 입장권을 끊고 저 위로 일주문이 보이는 계단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매표소까지의 오르막은 이제 오를 계단을 위한 준비운동이었지 싶다.
일주문을 지나 조금 더 계단을 올라 다리가 뻐근하다 싶을 즈음 벤치가 자리하고 있다. 앞서 가시던 할머님들이 ‘쉬라고 놓여있는 게야’라며 앉아 담소를 나누신다. 꽤 높이 오른 듯 오른쪽으로 보이는 바다 풍경을 바라보며 천천히 지나가는데 할머님들의 대화가 들린다.
‘야, 저 풍경 좀 봐라. 얼마나 멋있는지.’
‘멋있어 봤자. 물이고 산이고 돌이다.’
아이처럼 풍경에 감탄하시는 모습도 달관한 듯 말씀하시는 모습도 모두 다정하다.
아득해 보이는 저 위쪽으로 등용문이 보이고 중간중간 아기 부처 석상들이 보인다.
두 눈을 가린 아기 부처
不見
남의 잘못을 보려 힘쓰지 말고
남이 행하고 행하지 않음을 보려 하지 말라.
항상 스스로를 되돌아보고 옳고 그름을 살펴야 한다.
두 귀를 가린 아기 부처
不聞
산 위의 큰 바위가 바람에 흔들리지 않듯이
지혜로운 사람은 비방과 칭찬의 소리에도 평정을 잃지 않는다.
不言
나쁜 말을 하지 말라
험한 말은 필경에 나에게로 돌아오는 것.
악담은 돌고 돌아 고통을 몰고 끝내는 나에게 되돌아오니
항상 옳은 말을 익혀야 한다.
법구경에 나온 말씀을 적어 놓은 글이다. 해맑은 아기 부처의 모습과 함께 글을 읽으니, 마음이 다소 맑아지는 것 같다.
아기 부처들 덕에 등용문까지 올라오는 꽤 긴 계단길이 심심하지 않다.
등용문을 지나자 탁 트인 바다가 보이는 전망대가 위치해 있다. 전망대 데크마다 소원을 적은 금박의 나뭇잎이 빼곡하다. 차를 파는 곳도 있었는데, 부처님께 인사를 먼저 드리자 싶어 내려오는 길을 기약한다. 전망대에서 바라보면 저 먼바다로 거북이 머리와 발의 형상이 또렷이 보인다. 풍수지리적으로 향일암의 지형은 경전을 등에 지고 용궁을 향해 바닷속으로 막 잠수해 들어가는 거북이의 형상이라고 한다. 머리 부분에는 군사시설이 위치하고 있어, 왠지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이어 해탈문 등 바위가 어우러진 아름다운 길을 지나면 대웅보전이 자리 잡고 있다. 군데군데 심어진 동백나무에 이제 막 피기 시작한 동백이 수줍게 아름답다.
평일 오전인데도 꽤나 사람이 많다. 기념품과 공양품을 파는 곳에 들어가 둘러보다, 사람들과의 관계를 좋게 해 준다는 장미석 팔찌를 하나 골라 들고 나왔다. 사람들과 활발히 교류하며 잘 지내기보단, 사는 동안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거나 받지 않고 세상과 사람들에게 무해한 존재이길 바라는 마음이다.
관음전과 바다를 바라보며 서있는 관음상 앞에서 고요해 보이는 먼바다를 한참 바라보다 그저 산책하듯 주변을 천천히 걷는다. 돌과 건축물과 바다가 조화롭게 아름다운 풍경이다. 해를 향해 있다는 의미의 사찰명처럼 해돋이 명소도 있다. 이곳에서 해돋이를 볼 기회가 이생에 있을까? 생의 어느 순간도 장담할 수 없는 것이 인생이라 생각하기에, 답을 미룬다.
거북이와 관련된 전설이 있는 곳이라 그런지 곳곳에 거북이 석상들이 자리 잡고 있고, 거북이 목마다 색색의 염주가 걸려있거나 머리마다 동전 한두 개씩을 이고 있다.
무슨 복을 빌었을까?
크고 작고, 평범하고 특별했을 그 마음들에 자꾸만 눈길이 간다.
한 바퀴 돌아 주차장 쪽으로 내려오니 얼추 버스 시간이 다되어 간다. 옆으로 금오산 전망대로 올라가는 길이 보인다. 친구는 온 김에 가보자 하지만 버스 시간_다음 버스를 타면 될 일이건만_과 다음에 또 오려면 여지를 남겨야 한다는 핑계로 친구를 잡아끈다.
주차장 끝 즈음 늘어선 강정 가게의 유혹을 힘들게 뿌리치고 내려오니 진한 쌍화차 냄새가 퍼진다. 버스 타러 가는 길에 마시자고 한 잔을 사서 들고 나왔다. 출발 대기 중인 버스 앞에서 따뜻한 쌍화차 한 잔을 나누어 마신다. 진한 쌍화차에 견과가 듬뿍 들어가 무척이나 맛있다. 다음에 오면 꼭 다시 들러야지 생각하곤 출발 시동을 켜는 버스에 올랐다.
출발 전 낮술 한 잔을 하기 위해 여수 낭만포차 거리를 목적지로 정하고 돌산공원 앞에 내렸다. 보통은 관광지의 케이블카를 타는 일은 드믄데, 새벽 여정의 피로와 목적지 앞이 도착지라는 아주 적절한 이유로 케이블카를 타기로 했다. 일반과 크리스털 케이블카는 5천 원 차이인데, 그만큼의 무엇이 있겠지 하는 마음에 만원의 사치를 부려본다. 크리스털 케이블카는 바닥이 투명한 유리였는데 케이블카가 바다로 들어서자 투명한 바닥이 꽤나 스릴이 있어 짧은 거리지만 오랜만에 아이들처럼 신나게 즐기고는 자산공원에 도착했다.
십여분 정도 걸어 낭만포차 거리로 들어섰다. 예전 장범준이 여수밤바다를 부를 때 바닷가 쪽으로 늘어서있던 포장마차는 항구 한쪽 끝에 컨테이너박스들로 다 자리를 옮긴 듯하고 주변 상가들은 온통 문어삼합과 포차라는 이름을 달고 있다. 번잡스러운 상가들 사이에서 마치 시간이 멈춘 듯 들어서 있는 오래된 집인 종화집식당을 찾았다. 마당에 테이블들이 쭉 깔려 있는데, 춥지 않은 날씨라 여기서 마시면 분위기에 취해 오늘 집에 못 갈 수도 있겠구나 싶은데, 오늘은 장사를 안 하신단다. 엄마와 아들로 보이는 두 분이 연신 미안하다 하신다. 여기서 또 다음을 기약하고_기약이 많아 다시 꼭 여수를 찾아야 할 듯하다_근처 문을 연 식당으로 찾아들어간다.
문어삼합은 그저 적당한 맛이다. 하지만 햇살에 반짝이는 여수바다가 보이고, 필요할 때 손을 잡아주는 오랜 친구가 있고, 그리고 술이 있으니 그저 좋은 어느 한 낮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