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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하랑 Oct 19. 2021

중2병을 퇴마하며

[퇴마록]

굿바이,



고백한다. 더 있어 보이는 책을 고르기 위해 소박한 내 책장과 책 구매 목록들을 샅샅이 훑었음을. 


사실 처음 생각났던 책은 ‘퇴마록’이었다. 하지만 인생 책이 퇴마록이라니, 조금 없어 보이지 않는가? 그래서 좋아하던 한국 작가의 그럴싸한 문학 서적 한 권을 골라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웬걸, 생각처럼 잘 써지지 않았다. 미려한 단어와 문장, 완벽한 구조를 가졌고 전하려는 메시지도 좋았으며, 분명 나도 감명 깊게 읽은 것이 확실한데, 처음 한 문장을 쓴 후엔 진도를 나갈 수 없었다. 

벽에 부닥치고 다시 고민해보니, 역시 퇴마록이었다. 그 시절 나의 첫 판타지. 


처음 그 책을 만난 것은 중학교 2학년 때였다. 그때 난 허기를 채우듯 이 책 저 책 가리지 않고 읽어대고 있었다. 중학생이 되었으므로 언니의 책장에 있던 책들을 볼 수 있었고, 한국 단편선부터 외국 작가들의 길고 두꺼운 책들, 양들의 침묵 같은 하드코어 한 소설까지 분야가 꽤 넓었다. 

아직 무협소설이나 판타지는 읽어본 적이 없었는데, 같은 반 남자아이들이 돌려보던 책이 바로 퇴마록이었다. 평범한 여자아이와는 다르게 보이고 싶었던 난 친한 친구들은 거들떠도 안 보던 그 책을 읽기 시작했다. 


퇴마록은 신비한 능력을 가진 주인공 박 신부, 현암, 승희, 준후가 세상의 악을 물리치는 한국형 판타지였는데, 동서양의 오컬트와 듣도보도 못했던 종교들이 촘촘하게 이야기를 구성하고 있었다. 무섭고도 슬픈 이야기들이 여러 시리즈를 이어가고 있었고, 나는 막 첫 시리즈에 발을 담근 참이었다.


그건 호기심이 사랑이 된 전형적인 케이스였다. 동네마다 적은 돈으로 책이나 비디오를 빌릴 수 있는 곳이 흔하게 있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용돈을 조금 아끼면 읽고 또 읽을 수 있었다. 인기가 많은 책이어서 오래 기다려야 했을 때도 많았지만, 그 정도의 인내심은 문제 될 게 아니었다. 


나의 퇴마록 사랑은 수년이 지나도록 이어졌다. 고등학교에 가서도 신간이 나올 때마다 찾아 읽었고, 동명의 영화가 19금으로 개봉했을 땐 미성년자였음에도 친구와 사복을 입고 몰래 보러 가기도 했었다.

버스를 타고 다니면서 절을 지날 때마다 ‘저기 가면 준후 같은 애가 있을까?’ 생각했고, 주말에 성당에 갈 때면 ‘저 신부님은 엑소시즘을 할 수 있을까?’ 궁금해했다. 


그토록 내가 퇴마록에 빠졌던 이유는 명백했다. 퇴마록을 읽는 건 나름의 현실 도피용 수단이었다. 그 책을 읽는 동안엔 난 교복을 입은 수험생이 아니라 이상한 주문을 외고, 아무도 모르는 힘을 갖고 있으면서 다른 사람들을 돕는 히어로였던 것이다. 거긴 현실적인 걱정들이 없는 곳이었고, 가족보다 더 가족 같은 공동체가 존재하는 곳이었다. 그렇게 퇴마록은 나의 학창 시절을 지탱해 준 커다란 뿌리 중 하나가 되었다. 


그런 퇴마록에 대한 애정이 식은 건 별 다른 이유가 있어서는 아니었다. 성인이 되고 새로운 곳에서 새 삶을 살면서부터 퇴마록을 조금씩 잊어갔다. 현실이 상상만큼 재밌을 수 있는 대학생이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첫사랑과 헤어지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처럼, 더 실용적이고, 더 유명하고, 더 고급스러운 책들을 읽기 시작했다. 옛 친구들이 “너 퇴마록 좋아했잖아.”라고 하면 웃으며 “에이, 그건 어릴 때였으니까.”라고 대답할 수 있을 만큼 자연스러운 변화였다.


그러다 몇 해 전 전자책으로 개정판이 나왔다는 소식에 전 시리즈를 다시 읽었다. 나이를 먹고 읽어도 여전히 재미있을까 궁금했다. 다시 만난 그 책은 비문이 많고, 억지 설정도 있었지만, 흡입력과 캐릭터의 매력만은 여전했다. 몇 년 만에 우연히 길에서 만난 첫사랑의 모습에 약간의 실망과 추억의 따뜻함을 동시에 느낀 기분이랄까. 하지만 첫사랑은 잊을 수 없는 법, 퇴마록을 다시 읽고 난 후 가끔 꿈에서 그들을 만난다. 


그들은 나이 들지 않았고, 어디선가 악귀들을 물리치며 나를 보호해 주고 있었다. 그 악귀 중엔 사춘기 시절 내 온갖 불온한 생각과 비뚤어진 시선이 있었을 것이다. 나의 존재가 ‘현실의 나’가 아니길 바라는 헛된 욕망이 있었을 것이다. 당장 다른 곳으로 도망가고 싶은 불안함이 있었을 것이다. 


이제 난 현실을 살고 있고, 계산적으로 인간관계를 구분 지을 줄 알고, 엉터리 뉴스를 비웃을 수 있는 어른이 되었지만, 여전히 판타지를 사랑하고, 존재하지 않는 곳과 신비한 주문과 스릴 넘치는 모험을 상상한다. 아무리 강력한 악령이 나타나더라도 내 첫 판타지의 주인공들이 여전히 나를 지켜줄 테니까. 




                                                                 [이 글은 2W 매거진 '같이 읽어요'에 수록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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