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령견 #반려견 #반려인 #마루 #루이
"거참.. 약 먹이기 힘들구먼!!"
약을 안 먹으려고 고개를 내젓는 아이를 향한 다소 거친듯한 손길에 나도 모르게 아들의 손을 뿌리치고 보듬어 안자 다소 당황하며 서운한 듯 아들이 한마디 툭 던진다. 괜스레 미안하고 머쓱한 마음에 "달래가며 먹여보자.. 오래 먹으니까 루이도 지겨워 그러지"
힘든 시간을 짧게 해 주려는 아들의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다. 하지만 약물을 장복하는 심정을 젊은 네가 어찌 알겠니.... 하는 마음도 함께 스친다.
만 14년을 함께 살아온 귀한 인연과의 이별을 예감하기 시작하면서 불안은 찾아왔었다. 노령의 부모님께서 감사하게도 건강히 잘 지내주시는 덕분에 강아지와 이별 안에서 오랜 인연의 죽음으로 인해 맞이하는 안타까운 이별의 무게를 배우게 되었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비행기 사고로 어린 시절 엄마와 이별을 경험했었고, 19년 인생 중 가장 오랜 시간 공간과 감정을 함께 공유하던 할머니와의 이별에 경험을 갖고 있지만 그때의 '죽음'이란 단어 담긴 의미는 어린 날 미숙한 감정 안에 철없는 감정과 강요된 슬픔 같은 느낌으로 남아 있다.
반려인이 된 건 인간의 이기심에서 출발된 욕심 같은 것이었다. 혼자 많은 시간을 보내는 아들 녀석이 바라던 동생의 역할을 대신하길 바라는 대상이었고 아들 녀석의 책임감과 여러 가지 성숙한 감정을 반려의 과정에서 직간접적으로 배우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정작 나는 생명에 대한 책임감과 가족의 일원으로서 그들에게 어떤 보호자가 되어 주겠다는 준비된 마음 없이 그냥 그렇게 반려인이 되었다.
스스로 어떤 책임과 어떤 행복을 누릴 수 있는지 조차 모르면서 2~3개월 차 밖에 안된 어린 개체를 연달아 분양받았고 2마리를 키우고 함께 하면서 처음에는 그 수많은 접종과 병원 검진 부담스럽기도 했고 만만치 않은 사료비 간식비 그리고 장난감과 산책용품 카시트에 옷가지까지 경제적으로 부담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집안에서 보이는 여러 가지 강아지들 흔적들과 규칙적이어야 하는 산책과 목욕도 바쁘게 돌아가는 일상 시간 안에서 심신이 지쳐 있을 때 짜증스러웠다. 그런 심정적 부채도 무거웠다. 그때는 스스로 부족한 줄 몰랐고 상황으로 바라보는 시선을 갖았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순수한 마음으로 진심을 다하는 사랑하는 마음을 먼저 내어 준건 마루였다. 마루를 통해 자신보다 타인을 더 사랑하는 마음을 배우게 되었다. 마루는 단 한 번도 화장실 간 나를 혼자가게 둔 적이 없었다. 그것이 낮이든, 밤이든, 새벽이든 한결같았다. 젊은 날 잘 따른다고 좋아하던 이기적인 마음이 세월이 흐르면서 나이 들고 발걸음이 무거운 녀석의 새벽잠을 깨울까 싶어 급하지 않으면 날이 밝을 때까지 참는 사랑을 배웠다.
일에 시달려 새벽 귀가에도 묵묵히 현관 앞에서 반겨줬고, 상처받고 힘든 날은 슬픈 표정으로 곁에 앉아줬고 슬픔을 이기지 못해 울던 날은 내 앞에 앉아 토닥이듯 손을 내밀었다. 언제나 나를 바라보고 내가 먼저였던 그 아이를 통해 인간에게서 느끼는 교감과는 다른 결에 감정을 느끼고 배우게 되었다.
이렇듯 진정한 의미의 '함께'를 배우고 알아가며 나에 삶은 훨씬 더 풍요롭고 풍성해졌다. 많이 웃었고 행복했고 많이 위로받았으며 진정한 사랑을 느꼈다. 2년 전 첫째 아이가 무지개다리 건넜을 때 느꼈던 마음은 노화와 죽음에 대해 보다 깊이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많이 사랑했고 사랑받았기에 슬픔이 지배 감정은 아니다. 그리움으로 남은 녀석은 언제나 든든하게 마음 안에 자리 잡고 있다. 마지막 순간까지 잊지 않을 존재를 만났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 미숙한 보호자를 성숙시켜 주고 간 그 녀석 덕분에 지금 남은 시간을 함께하는 루이는 보다 나은 케어를 받고 있는 건 아닐까 싶다.
활동시간보다 자는 시간이 월등이 많아졌고 딱딱한 고형식의 식사는 저작도 힘들고 소화도 힘들어 조금 부드럽고 소화하기 좋은 종류의 간식을 준비하게 되고 자연 100% 재료를 사용하는지 꼼꼼히 살핀다. 입욕제는 피부에 민감도를 체크하게 되고 산책하기 좋은 날씨를 놓치지 않고 싶다. 복용하는 약의 성분이 바뀌면 생활 반응에 차이가 있는지 좀 더 관심 갖고 관찰 한다. 숨소리가 조금만 거칠어도 자다가 일어나 한없이 쓰다듬으며 진정 시키느라 잠을 설치기도 한다.
2년 전 건강 검진하고 의사 선생님께서 "받아들이기 쉽지 않겠지만 노령화가 된 지금 루이에게 처방되는 약은 치료를 위해 약을 복용한다기보다는 남을 생을 조금이라도 편안하도록 돕는 약이예요"라고 말씀 하셨었다. 그때 느꼈던 낙담은 내가 수술을 해야 한다는 진단을 받았을 때 보다 컸다.
시간이 지나면서 불치 진단 후 느꼈던 불안이라는 감정은 어디로부터 온 것이었는지 생각해 보았다. 막연히 죽음이라는 이별에 대한 것이었을까? 아니면 그 과정을 통한 루이가 느낄 고통 때문이었을까?그것도 아니면 죽음 이후에 느낄 그리운 시간 때문이었을까? 어쩌면 그 감정은 불안이 아닌 슬픔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어제는 나란히 누워 눈을 맞추고 바라보며.. 고마워 사랑해 루이야.. 네가 무지개다리를 건너기는 과정이 힘든 과정이 아니었으면 좋겠지만 다소 힘들더라도 너도 나도 그 시간을 잘 보내자. 그리고 먼저 가게 되면 형아가 기다리고 있을 거야. 엄마가 너희들 곁에 갈 때까지 형아에게 새침하게 굴지 말고 잘 지내야 한다.
나는 이미 알고 있다. 너의 지금이 현제의 나에 모습이면서 앞으로의 나이 든 나의 삶의 일상을 미리 보는 일이란걸.. 그 외롭고 단조로운 일상을 외면 없이 바라보고 공감하는 중이다. 함께하는 시간이 얼마만큼인지는 가늠 할 수 없지만 루이야 네가 사는 그날까지 너무 힘들지 않도록 더 관심 가져 볼게. 사랑한다 루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