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에 두 번 연속 탈락하면서 한동안 마음의 거리를 두었던 이곳에 드디어 공개적인 글을 쓸 수 있게 됐다.
연달아 이 화면을 마주했던 작년 가을밤, 나는 마음이 팍 꺾여버렸다. 그날 내 잠자리는 요가매트 위였다.
요가매트에 모로 누워 어깨를 둥글게 말고 무릎을 끌어올린 뒤 자기 모멸감 속에서 헤엄치다 모든 에너지를 소진한 채, 무기력한 잠에 들었다. 사실 요가매트에서 이불 한 겹, 베개 하나 없이 찌뿌둥한 밤을 보낸 것은 그날이 처음은 아니었다. 목표하고 욕망했던 것을 성취하지 못한 날마다 나는 요가매트로 올라갔다.
나의 이런 잠버릇에 어떤 의미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걸 깨달은 건 작년 겨울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였다. 그 전날에도 나는 어떤 이유로 요가 매트 위에서 잠들었다. 어깨가 영 찌뿌둥한 이유를 설명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잠버릇 얘기가 나왔다.
내 얘기를 가만히 듣던 친구 a는 '스스로에게 벌을 주는 거잖아?'라고 했다. 놀라움 반, 안타까움 반의 목소리였다. 친구 b는 그 말을 이어받아 나의 잠버릇에 '요가 매트 형벌'이라는 이름을 붙여줬다.
스스로의 기대치를 만족시키지 못했다는 이유로, 남의 인정을 얻어내지 못했다는 죄로 나는 요가매트 위에서 숱한 밤을 보냈다.
이 형벌은 20대 마지막 해를 보내던 작년에 특히 자주 가해졌다. 회사에서 기대만큼의 성과를 내지 못한 날, 모부님에게 착한 딸이 되지 못했던 날, 스스로 목표했던 만큼의 하루를 살지 못했다고 느낀 날... 속한 모든 삶의 구역에서 요가 매트는 너무 쉽게 형벌대가 되었다.
그 겨울밤 친구 a, b가 나의 메타인지를 깨워주고 나서야 나의 형벌은 끝이 났다. 아니, 서서히 잦아들었다. 나의 요가 매트는 이제 자기의 원래 쓰임을 잘하고 있다.
나를 돌아보고 거기에서 죄를 찾아내는 일은 결국 내 몸과 마음을 괴롭히는 것 이상의 효과를 내지 못한다. 차갑고 얇은 요가 매트에서 하루를 시작하는 건 '오늘도 나를 벌주러 가볼까?' 하는 것과 다를 게 없단 걸 이제 안다.
언제든 벌 받을 준비가 돼 있는 사람에게는 일상의 모든 이벤트가 사건사고가 된다. 문제를 고치려는 마음을 먹기도 전에 자책에 빠지고 만다. 남들이 신경 쓰지 않는 사이에 스스로에게 유죄를 선고하고 죄인이 된다.
미안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아무도 죄인이 된 나를 안타까워하지 않는다. 안타까워할 이유가 없다. 누구도 나에게 그러라 하지 않았기에. 그러니까 스스로 죄인이 되지 말자. 어떤 형태로든 자신을 벌주려고 하지 말자. 그 에너지의 방향을 돌려 조금이라도 앞으로 더 나아갈 방법을 찾자. 반 발자국이라도, 아주 조금의 움찔거림이라도 좋다.
이건 나의 숱한 밤을 찌뿌둥하게 만든 요가 매트 형벌을 폐지하고 나서야 알게 된 깨달음이다. 겪고 나니 알겠다. '나를 벌주지 마세요' 이런 류의 세상 뻔한 이야기를 굳이 시간을 들여 글을 쓰고 이야기를 하고 책까지 내는 이유. 나와 비슷한 사람들이 또 있을까? 나의 요가 매트처럼, 각자의 형벌을 갖고 살아갈까?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자신의 삶을 버티고, 더 나아가려 하고 있을까? 궁금한 마음이 커진다. 세상이 하나의 커다란 자조모임이 된 것만 같다.
그래서 일단 써보기로 했다. 이건 내가 나를 버티는 방식, 자책에 빠지지 않고 어떻게든 나아가려는 노력에 대한 기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