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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 Nov 26. 2023

왜 인터뷰를 했나? -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

나의 사이드 프로젝트 연대기 01


  이번엔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 시리즈다.

사이드 프로젝트의 핵심은 이 문장에 있는 것 같다. 시키지 않은 일을 도대체 왜 하는 걸까?

누가 돈을 주는 것도 아니고, 먼저 인정해 주는 것도 아니고, 안 하면 페널티가 있는 것도 아닌데.


  이유야 다양하겠지만 나에게는 "'하고 싶다'는 아주 순수하고 단순한 의지를 꺾지 않기 위해서"다.

언제 가장 불행한가를 생각하면, 나는 하고 싶은 일이 없을 때, 아무것도 설레지 않을 때 가장 불행하다. 금세 우울하고 무기력해진다. 그러니까 하고 싶다는 마음은 정말 선물 같은 거다. 그 마음이 식거나 날아가버리기 전에 장작을 넣어 불태워줘야 한다.





왜 인터뷰를 했나?


  첫 번째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는 인터뷰에 대한 이야기다.

  2021년 동기의 자취방에서 인터뷰를 시작했다. 인터뷰이는 내 대학 동기였고, 가장 친밀하게 지내면서 또 가장 존경하는 친구였다. 주변 사람들만 둘러봐도 이렇게 특별한 점이 쏟아지는데! 사람들의 특별함을 조명하고 싶었다. 미디어에서 주목하는 특별함이 아니라, 주위에서 찾아볼 수 있는 평범한 특별함. 사람마다 가진 반짝이는 마음과 번뜩이는 생각 같은 걸 담고 싶었다. 그때 나에겐 잘 시작하는 사람들이 가장 특별했다. 그런 사람들이 하는 말은 유독 번뜩였다.


  인터뷰의 제목을 <시작하는 사람들>이라고 정했다. 하고 싶은 마음 그대로를 담은 직관적인 제목이었다.

첫 인터뷰를 올리며 인스타그램을 통해 다음 인터뷰이를 구했다. 과연 신청이 있을까? 놀랍게도 있었다. DM을 받은 뒤에 친구에게 공유하며 호들갑을 떨었던 기억이 난다. 하나를 올리면 또 그다음에도, 올리고 나면 또. 그다음에도 인터뷰 신청이 들어왔다. 그렇게 직장 생활을 하며 간간히 인터뷰를 해나갔다.



사람마다 가진 반짝이는 마음과 번뜩이는 생각 같은 걸 담고 싶었다. 그때 나에겐. 잘 시작하는 사람들이 가장 특별했다. 그런 사람들이 하는 말은 유독 번뜩였다.



  회사를 다니면서 인터뷰를 진행하는 건 역시 쉽지 않았다.

인터뷰이들에게 너무 죄송스럽게도 퇴근 후 자주 인터뷰에 늦었다. 인터뷰어가 미리 대기하기는커녕 늦어버리다니! 자괴감이 들었다. 친절한 인터뷰이들은 부족한 인터뷰어를 탓하지 않았다.


  우리가 하는 건 인터뷰보다 대화에 가까웠다. 초면이지만 이미 글을 통해서 비슷한 생각과 가치관을 나누고 있는 사람들과 대화를 했다. 말하다 보면 내가 어렴풋이 갖고 있는 생각에 확신을 더할 수 있었다. '반드시 사람들의 기준에 맞춰 살 필요는 없다'든지, '재미를 찾아서도 일을 해나갈 수 있다'든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건 인생의 가장 중요한 가치가 될 수 있다'든지. 가만히 놔두면 의심 속으로 파고드는 생각들이 인터뷰이를 만나 건강한 활력을 얻었다. 실제로 그들은 그렇게 살고 있었다. 삶에 대한 다양한 레퍼런스를 만나는 과정이기도 했다.


  인터뷰를 하고 나면 언제나 부푼 의미와 재미를 갖고 돌아왔다. 준비에 대한 부담이나 정리하는 수고로움을 벗어나 인터뷰날은 항상 설레는 마음이었다. 그 마음 덕에 지속할 수 있는 일이었다. 횟수로 12번, 기간으로는 1년이 넘게. (이후 책을 만들기 위해 2차 인터뷰를 진행하며 인터뷰 횟수는 10번이 늘었다.)



내가 따뜻한 시선으로 그들의 장점을 찾아 바라보듯, 
인터뷰이 역시 나에게 그러했다.


  언젠가 상담 선생님은 내 인터뷰 활동을 아주 칭찬한 적이 있는데, 이게 긍정적인 자아를 형성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는 거다. 그럴 수밖에. 인터뷰할 때는 상호관계 속에서 나를 재해석할 수 있었다. 내가 따뜻한 시선으로 그들의 장점을 찾아 바라보듯, 인터뷰이 역시 나에게 그러했다. 어떨 땐 용기나 실행력을 칭찬받았고, 어떨 땐 콘텐츠를 만드는 능력을, 또 큐레이션 능력이나 진행하는 솜씨를 칭찬받았다. 건강하고 튼튼한 자아가 생기는 과정이었다.


  회사를 다니며 형성하는 동료나 후배로서의 나, 가족들에게서 형성하는 나, 친구와 연인에게서 형성하는 나, 그 무엇과도 또 다른 종류의 내가 만들어졌다. 한정된 역할에서 나를 바라보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더 자유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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