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정 Feb 05. 2022

글감에도 유통기한이 있는지 몰랐네

미처 쓰지 못하고 버려지는 글에 대해

  

특정 시기가 지나면 쓸 수 없는 글이 있습니다.

오랜만에 컴퓨터 폴더 정리를 하며 실감했어요. 한참 열어보지 않았던 '글쓰기' 폴더 안에는 미처 쓰지 못하고 남아버린 글감 목록이 있었습니다. 엑셀 파일에 깔끔히 정리된 채로. 아마 브런치 작가신청을 하기 위해 모아놓았을 겁니다.




후킹한(후킹하려고 노력한) 제목과 간단한 설명이 보입니다. 어떤 글은 세네 줄 정도 쓰다 말았습니다. 다행히 브런치에 발행된 글이 있고, 그렇지 못한 비운의 글도 있어요. 발행된 글은 주황색 셀로 표시해뒀습니다. 매거진별로 글을 분류했는데, 당시 계획으로 저는 두 가지 주제의 매거진을 만들어 글을 꾸준히 발행할 생각이었습니다. 하나는 지금도 제 작품 목록을 열면 볼 수 있는 「자급자족 디자인 노트」고, 또 하나는 바르셀로나에서의 생활/여행기를 담은 「이제 빠에야를 먹으면 돼」였습니다. 후자의 제목이 낯선 이유는 지금까지 단 한 편의 글도 발행하지 못했기 때문이죠.


바깥의 빛을 보지 못한 대부분의 글감은 이제 유통기한이 지났습니다. 더 이상 쓸 수 없는 글인 겁니다. 그 이유를 곰곰히 생각해보다가 네 가지 유형으로 정리해봤습니다.



(1) 기억이 소멸됨 (= 포장지만 있고 속재료는 잃어버림)

어떤 제목은 제법 재미있게 썼지만, 제목만 봐선 뭘 쓰려고 했는지 도저히 기억나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남이 쓴 문장 같기도 하네요. 제목을 클릭해 열어보고 싶지만 이제 글의 주인은 영영 사라졌습니다. 무슨 내용인지는 알려주지 참.


(2) 디테일이 부족함 (= 부분적으로 상함)

한편 어떤 제목은 대략 뭘 쓰려고 했는지는 기억나지만 기억의 디테일이 떨어져 쓸 수 없습니다. 이를테면 카프레제를 만드는 방법은 지금도 알고 있긴 하지만, 제가 그 레시피를 어디서 배웠는지, 장은 어디서 봤는지, 어떤 기분으로 요리를 했는지 등은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스페인에서는 치즈가 참 저렴했는데, 이 정도가 기억의 전부입니다.


제가 좋아했던 바르셀로나 미술관에 대한 묘사는 별도의 한글 파일로 한 다섯 줄 정도 남아있었는데, 기억이 희미하다 못해 새로운 정보로 느껴질 지경입니다.

"바르셀로나 디자인 미술관의 묘미는 건물 바로 옆에 펼쳐진 선베드와 캠핑 의자들이다. 아무렇게나 놓여 있는 이 의자들은 방문객들이 완벽한 여유를 즐기도록 마련되었다."

관광 가이드를 보는 듯 새로웠어요. 얼핏 햇살이 뜨거워 야외 의자에 오래 앉아 있지 못했던 것은 기억이 납니다. 기념으로 챙겨온 오래된 영수증 종이가 바래듯이 기억도 흐리멍텅 바래버렸습니다.


(3) 생각이 달라짐 (= 전체적으로 상함)

어떤 건 지금의 감성으로 도저히 쓸 수 없습니다. 심지어 잘 읽어 보면 지금의 저와 반대되는 생각을 펼치고 있는데요. 특히 스페인에서의 기억은 상당 부분 뽀얗게 필터를 씌우는 미화의 과정을 거쳐 이런 현상이 더욱 심합니다. 몇 줄 적어놓은 '스페인에서의 평범한 하루'에는 이런 문장이 쓰여 있습니다.

"모든 날이 다 좋았나? 절대 그렇지 않았다. (중략) 처음엔 특별하게 느껴지지만 결국 익숙해진다."

그걸 읽은 지금의 저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배부른 소리하네."


마찬가지로 「자급자족 디자인 노트」는 더 이상 발행하기 어렵습니다. 디자인에 대한 제 생각이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한창 진로를 고민하며 어떤 분야를 택해야 할지 혼란스러웠을 때는 디자인에 대한 열정도 넘쳐 흘렀습니다. 그땐 디자이너가 될 수도 있다고 믿던 시기거든요. 저의 정체성에 디자인을 꼭 넣고 싶었죠. 그래서 집착하다시피 디자인을 해보고, 또 디자인에 대한 글을 썼습니다. 이때 만든 블로그의 타이틀이 '디자인하는 인문대생'이었는데, 이제는 쓰기 곤란합니다. 더 이상 인문대생도 아니고, 디자인을 하지도 않기 때문이에요. (이제 어떤 타이틀을 써야 할지 고민입니다…)


디자이너와 역할이 명확히 분리된 채 일하고 있는 지금의 저는 디자인에 대해 말하기가 조금 부끄럽습니다. 전문가는 따로 있으니 의식적으로 디자인에 대한 주도권이나 생각을 버리려고 합니다. 그렇다고 그때의 제가 서글퍼할 필요는 없겠습니다. 당시 믿던 대로, 디자인은 모든 것에 이미 녹아 있고 디자인에 지속적으로 노출된 것은 저의 정체성 형성에 큰 도움이 되었으니까요.


생각이 달라진 건 상황이 변했기 때문입니다. 디자인을 동경하고, 끝도 없고 답도 없는 진로 고민을 하면서, 혼자 바르셀로나 집에 앉아 조금 외로워하던 대학생은 이제, 마케팅을 하고 유례 없는 전염병으로 한국 밖은 한 발짝도 못 나가며 재택근무를 하고 있는 직장인과 상황이 너무나 다릅니다.


(4) 퇴화함 (= 싹이 남)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제가 성장하고, 성숙했음을 느끼면서 감성에 젖을 법도 하지만, 마냥 성장하진 않은 것 같습니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치히로가 처해진 상황에 따라 변화할 뿐, 성장하진 않았음을 의도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거 성장 서사가 아니었던가? 믿거나, 말거나 출처도 불분명한 이야기지만 "사람은 변하지, 마냥 성장하지 않는다"는 말에 저는 일정 부분 공감합니다.


깊이 들어갈 것 없이 제 스페인어 실력은 퇴화했습니다. 제법 간단한 대화가 가능했던 이때는 외국어를 배우는 일에 대한 글도 쓰고 싶었는데요. 취업이나 자격증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외국어 배우기의 즐거움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실전에 내던져져 배우는 일, 말이 틀려도 부끄럽지 않아 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도 쓰고 싶었습니다. 그때 저는 스페인어를 더 잘하기만 한 게 아니라, 더 용기 있었고, 생각이 풍부했어요.


옛날에는 더 반짝이고 번뜩이던 것이 지금은 그렇지 않다고 느낄 때가 많습니다. 곰곰히 생각하니 무언가 배우는 사람이 가지고 있는 특별함이 있는 것 같습니다. 어른들이 학창시절을 예쁘게 추억하는 건 마냥 미화되었기 때문도, 가질 수 없는 젊음 때문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이유도 물론 있겠지만) 학창시절이라는 게 온전히 공부하고, 배우는 시기이기에 더 예뻐 보이는 것이 아닐까 했어요. 배우는 게 '일'인 시기가 그 이후로 다시 찾아오긴 어려우니까요. 우리는 만학도에게서도 비슷한 종류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곤 하고요.





물론 배우는 상태는 미성숙한 상태입니다. 미성숙한 상태는 항상 부끄럽고요. 부끄럽기 시작하면 글을 쓰기는 어려워집니다. 하지만 아직 배울 게 남아있고, 배우고 싶은 의지가 강력할 때만 가질 수 있는 반짝임이 분명히 있습니다. 학생은 아니지만 다행히 배울 건 많습니다. 제 스스로가 미성숙하고 부족하다고 느껴질수록 글을 써서 생각을 남겨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는 제 생각이 어디 도망가지 않을 줄 알았는데 시간이 지나고 상황이 변하면 생각도 너무나 빨리 변해버린다는 걸, 오늘 문제의 엑셀 파일을 보며 알았습니다. 변할 뿐만 아니라 퇴화하기도 하고요.


그러니 머릿속에 떠오른 글은 유통기한이 지나기 전에, 빨리 써버립시다.



ps.

제때 쓰지 못한 글감이 아까워 애써 되살려보았습니다. 상한 감자의 싹을 요리조리 파가며 살펴 보았는데 이게 요리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에세이 연습 (2) 음식과 책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