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급자족 디자인 노트 01
나의 첫 디자인
처음이 언제인지를 되짚어보는 일은 의외로 어렵다. 첫 옹알이는 언제 했고, 내가 읽은 첫 책은 뭐였던가? 첫 용돈은 어디에 썼고, 술을 처음 마신 날은 어떤 날이었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처음 내 손으로 탄생시킨 디자인이 무엇일까. 막상 제목을 쓰고 나니 무지 어렵다. 고등학교 때 포토샵을 야매로 배워서 만든 잡지로 얘기를 시작해볼까. 그 전에 내 손으로 처음 쓴 동화를 집 프린터로 자랑스레 뽑아 표지를 그렸던 것도 디자인이 아니었을까, 그보다 더 전에, 더 전에는?
결국 난 여기까지 왔다. 미취학 아동, 나는 땡땡 유치원을 다니고 있었다. 어머니는 미대 출신 인테리어 디자이너셨고, 집에는 건축 도면이 수십 장씩 돌아다녔다. 이면지에 낙서하다보면 그 뒷면은 항상 어느 건물의 도면이었다.
그러다보니 하늘에서 본 조감도식 도면은 내가 생각하는 집의 전형이었다. 그래서 유치원 미술시간에 선생님이 “집을 그려보세요!”라고 하면 그 흔히 그려지는 삼각형과 사각형이 합쳐진 집 모양 대신에 도면처럼 생긴(다만 어린아이의 손으로 삐뚤빼뚤한) 집을 그리곤 했다.
불행히도 그 집이 건축 도면인줄은 꿈에도 모르셨던 선생님은 “집이 왜 이렇게 생겼냐”며 나를 다그쳤고, 어린 나는 집에 와서 울며 일러바쳤다. 엄마! 선생님이 내가 그린 집 이상하대!
미술교육에도 관심이 많으셨던 어머니는 결국 유치원에 찾아가 크게 화를 냈다. (이모는 종종 이 사건을 ‘유치원을 뒤집어엎었다.’고 회상한다) 미술교육의 목표가 뭐냐며, 아이들이 똑같은 그림을 그리도록 만드는 게 전부냐며, 또 아이가 어떤 생각으로 이 그림을 그렸는지는 물어보았냐며, 기타 등등. 아직도 이 일을 떠올리면 어머니는 열이 나서 언성이 높아진다.
<어린왕자>의 첫 부분에서 작가는 어렸을 때 그린 그림을 회상한다.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을 그렸는데, 어른들은 자꾸 모자라고 대답하는 것이다. 자신의 그림 실력에 비관한 작가는 결국 그림을 포기하고 비행사가 되었다.
이 ‘유치원 집 그림 사건’ 덕에 나는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을 모자라고 말하지 않을 수 있었다.
물론 나는 지금까지도 내가 그림을 잘 그린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감각은 있는 편이지만 대단히 실제와 똑같은 그림을 그려내거나, 누가 봐도 감탄할 그림 실력을 가진 것은 절대 아니었다.
미대 출신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것은 그림 실력이 아니었다. 어떤 사물을 나만의 시각으로 바라보고, 그걸 당당하게 표현할 수 있는 힘이었다. (결국 그게 디자인의 뿌리였다) 내가 그린 집에 비관하지 않을 수 있었던 덕에 지금 나는 제법 그림이나 디자인과 친한 사이가 되었다.
나만의 집 그림을 그렸던 것, 그게 내 디자인의 시초다. 그게 집이라는 걸 인정받으면서 나는 내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어디서 본 그림들, 관습적인 그림들, 남들이 그리는 방식대로 그린 그림들 대신 온전한 내 그림을 그렸다. 잘 그리든 못 그리든 상관은 없었다. 나의 어머니와, 집과, 돌아다니던 도면과, 그 모든 환경으로부터 받은 영향이 온전한 내 것이 되었다.
그렇게 나는 어머니로부터 무사히 디자인적 사고관을 물려받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