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급자족 디자인 노트 02
이 잡지는 망했습니다
솔직히 말해 리더십이 있는 편은 아니다. 그런 내가 어떤 모임의 장을 맡은 적이 있었는데, 바로 고등학교 때 직접 만든 잡지 동아리다.
잡지 동아리는 조금 생소하게 들릴 수 있다. 교지도, 신문도, 영자신문도 아닌 잡지. 보그, 엘르 뭐 그런 잡지. 나는 학교 안에서 잡지가 만들고 싶었다. 이름하야 청소년 문화 잡지. 청소년에게도 문화와 취향과 라이프스타일이 있다며 호기롭게 시작한 잡지 동아리였다. 지금 나온 잡지들로 말하자면 킨포크kinfolk나 어라운드around처럼 취향과 라이프스타일을 담은 감각적인 잡지를 만들고 싶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결과는 처참했다. 시기를 놓쳐 출간을 위한 지원금은 한 푼도 받지 못했고, 한 해가 끝나자 창간호를 마지막으로 폐간되었다. 동아리를 지속할 사람이 없었다.
그래도 나는 이 이야기를 실패담이라 말하고 싶지 않다. 잡지를 만들기 위한 1년의 고군분투는 나의 짧은 디자인 역사에 상당히 큰 획을 그은 사건이었다. 잡지의 기획부터 시작해서, 같이 만들 사람을 불러 모으고, 기사를 작성해서, 적은 페이지나마 편집도 예쁘게 해서 출간해냈다.
갓 뽑힌 잡지들은 프린터의 열기가 식지 않아 말 그대로 따끈따끈했다.
처음 잡지 동아리를 만들고 싶었던 건 서울에 관한 한 잡지를 보고 난 뒤였다. 그전까지 잡지라면 미용실에 쌓여있는 그런 여성 패션 잡지들만을 떠올렸었는데, 서울에 대한 이야기들을 담은 꽤 큰 판형의 그 잡지는 꽤 큰 충격을 가져다줬다. 감각적인 레이아웃과 일러스트, 기사를 구성하는 통통 튀는 기획 같은 것들이 (적어도 나에겐) 완전히 새로웠다. 그때 생각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찾았다! 하고.
때마침 티비에선 김혜수가 아주 멋지게 잡지 편집장으로 나오는 드라마가 방영 중이었다. ‘엣지있게’라는 말을 유행시킨 바로 그 드라마는 꼬꼬마 고딩을 설레게 했다. 머리도 막 쿨하게 단발로 잘랐다. (남들이 보기엔 그냥 삐침머리였을 것이다) 엣지병에 걸린 것이다.
나는 잡지를 만들어야 한다! 나에게 그런 추진력과 집념이 있는 줄 처음 알았다. 고딩인 내가 할 수 있는 건 교내에 동아리를 만드는 것이었다. 그다음엔 내 맘대로 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렇게 주변 친구들을 설득해가면서 동아리를 같이 만들 사람을 모았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을 데리고 왔다. 패션에 관심 있던 한 친구는 잡지를 만든다는 목표에 동의하며 우리 동아리의 부회장이 되었다.
신입 모집도 해야 했다. 소개 영상을 만들고, 홍보 포스터를 만들고, 면접 질문지를 만들면서 리쿠르팅을 준비했다. 그러는 사이에 내가 설득했던 친구들은 대거 빠져나가 몇 명 남지 않았다. 신입이 절박했다. 결국 기준 인원을 겨우 넘었다.
그다음부터 모든 일이 쉽지 않았다. 모든 것이 새로 배워야 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의 나로서는 최선을 다했지만, 지금 보기에는 어처구니없는 실수투성이였다. 사람을 움직이는 일은 그중에서도 가장 어려웠다. 지금도 어렵지만, 18살엔 더더욱 버거웠다.
동아리에는 매주 정기 모임과 정기 보고가 있었고, 축제 시즌엔 부스 기획과 진행을 해야 했다. 그밖에 잡지를 만들기 위해 해야 했던 일은 다음과 같다.
전체 컨셉 기획, 카테고리 구성, 기사 기획, 인터뷰 대상 결정, 질문지 작성, 인터뷰 미팅, 기사 작성, 퇴고, 미제출자 쪼기, 퇴고, 들어가는 말과 쉬어가는 글, 판형과 제본 방식 결정, 인쇄소 사장님 만나기, 편집 방식 결정, 표지 디자인, 내지 디자인, 홍보 포스터 제작, 포토샵 포토샵 포토샵, 다시 인쇄소 사장님 만나기.
설상가상으로 저렇게 포토샵 할 일이 많은데 디자인을 할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럼 만들자고 한 사람이 책임지고 하는 수밖에 없다. 한글 파일로 원고를 받은 다음 야매로 배운 포토샵으로 편집했다. 그때 포토샵 실력이 얼마나 처참했냐면, 텍스트 박스를 만들 줄 몰라 행을 나누고 싶을 때마다 엔터키를 눌러야 했다. 어찌어찌 50페이지가량의 노가다를 완성했다.
잡지를 종이로 뽑아내려면 인쇄소에 낼 돈이 필요하다. 앞서 말했지만 시기를 놓쳐 지원금을 받지 못했다. 이 상황을 극복할 획기적인 방안을 생각해냈으면 좋으련만 사비에 용돈에 축제에서 번 돈, 가족 찬스 등을 보태 잡지를 냈다. 마침 상금을 걸고 잡지 수기 공모전 같은 것이 열리기도 했으나, 수상하지 못했다. 교실을 돌며 금쪽같은 잡지를 비치해두고, 몇 명에게는 잡지를 돈을 받고 팔았다. 말도 안 되는 가격에 이 잡지를 산 친구들은 그냥 의리와 우정을 산 셈이었다. 그러고도 부수 계산을 잘못했는지 많은 재고가 집에 그대로 남았다. 산수도 제대로 못한 것이었다.
반응을 확인할 새도 없이 동아리는 사라졌다. 한 기수를 끝으로 폐간되었다. 잘 생각해보면 일단 이 잡지의 가장 큰 문제는 (마케팅의 관점에서 보자면) 타겟 분석을 하나도 하지 않은 것이었다. 사용자의 니즈고 뭐고 그냥 내가 하고 싶은 걸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만들었다. 독자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내가 원하는 것에 초점을 맞췄다. 최선을 다했던 일을 실패하면서 쓰디쓴 오답노트를 하나 만들었다. 아, 내 맘대로 하면 안 되는 거구나.
모든 일이 끝난 뒤 나는 디자인이 하고 싶어졌다. 이 동아리와 관련해 했던 모든 일 중에 가장 좋았던 건 밥도 거르고 밤도 새우면서 다루었던 포토샵 작업이었다. 잡지 에디터에서 시작해 디자이너로 꿈이 발전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나는 디자인과에 진학하지 못했고, 그것과는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국문과에 가고 만다. (투비 컨티뉴드)
내 짧은 디자인 역사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이 잡지 이야기를 절대 빼놓을 수 없지만 적다 보니 이건 뭐 잘한 일이 하나도 없다. 마가 낀 하루를 읊는 것처럼 되는 일이 한 개도 없었다. 엄청난 실패다. 그래서 제목을 이렇게 붙일 수밖에 없었다. “이 잡지는 망했습니다”
단 한 가지 기특한 건 정말 하고 싶은 일에 의지를 불태웠다는 거다. 하고 싶은 일에 뛰어들어본 경험은 몸에 남아 학습된다. 그게 어떤 일이고 어떤 결과를 낳았든 간에 하고 싶은 일을 주체적으로 선택하는 일을 반복했더니, 나만이 걸어온 길이 되었다. 이 길을 이른바 속된 말로는 ‘개썅마이웨이’라고 한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잡지는 나왔습니다, 라고 끝나는 이 이야기로 인해 나는 디자인을 진지하게 생각해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