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전공자의 디자인과 포트폴리오

자급자족 디자인 노트 03

by 유정
비전공자의 디자인과 포트폴리오


우선 이 글은 비전공자가 디자인과에 가기 위해 만들었던 포트폴리오 작성법에 대한 이야기다. 디자인 회사로의 취업과는 전혀 관련이 없음을 미리 밝힌다. 에세이에 가까운 비실용적 글이라는 사실도 미리 밝혀둔다. 다만 비전공자가 어떻게 디자인에 입문하면 좋을지 궁금하다면 이 글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것이다.





지난 글에서 나는 디자인과에 가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고 얘기했다. 나는 국문과다. 미대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전형적인 인문대학을 다닌다. (그러나 왜인지 국문과에 디자인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의외로 많다)


국문학은 생각보다 나와 잘 맞았지만, 디자인에 대한 갈증은 그리 쉽게 해결되지 않았다. 처음에는 주어진 환경 내에서 닥치는 대로 디자인 작업을 해나갔다. 포스터가 필요하면 포스터를 만들고, 공연 리플렛을 만든다 하면 리플렛도 만들고, 어디 로고 필요하면 또 만들고. 디자인은 어디에나 필요하니 찾아보면 할 일은 많았다. 포토샵은 야매로 배웠고, 일러스트레이터나 기타 툴은 방학마다 강의를 신청해 들었다. (디노마드나 노트폴리오 아카데미)


디노마드의 일러스트 수업 중 그린 것 (모작이다)


우리 학교에는 이중전공이라는 제도가 있는데, 대부분은 이 제도를 통해서 두 가지 전공을 가지고 졸업하게 된다. 나는 2학년 때 디자인과 이중전공을 신청했다. 디자인을 하겠다는 마음이 확실했기 때문에 수업도 미리 들어두었다.

신청을 하면 다 받아주는 것이 아니라 지원서-면접-포트폴리오 등의 꽤나 까다로운 과정을 통해 몇 명만을 선발했다. 특히 디자인과는 티오가 적어 경쟁률이 높았다. 포트폴리오가 필수는 아니었지만 조금이라도 합격 확률을 높이고자 내 인생 첫 포트폴리오를 만들었다.


예술의 전당에서 잠깐 배웠던 누드 크로키, 혼자 그렸던 그림과 스케치, 대학에 들어와서 만든 이런저런 디자인 작업물들을 모조리 넣었다. 글도 넣었다. 내가 왜 디자인을 해야 하는지 이야기로 조금 더 어필하기 위해서였다. 그 점이 디자인에 대한 내 오랜 관심을 보여주기에 적합했던 것 같다. 인문학적 디자인, 공공디자인, 그런 이야기들을 열심히 썼다.



포트폴리오는 일러스트레이터로 편집했다. 정식으로 (돈을 내고) 배워서인지 포토샵보다 훨씬 편했다. 장수가 꽤 됐다. 학교 앞 인쇄소에 들고 가 스프링 제본을 했다. 오돌토돌한 커버까지 끼워주셔서 제법 그럴싸해 보였다. 포트폴리오를 끼고, 세미 정장이라 하기에도 어설픈 흰 셔츠와 까만 치마를 입고 면접에 갔다.


면접장엔 디자인학부의 학과장 한 분이 계셨다. 가져간 포트폴리오를 나름 세심히 보시더니 ‘스케치 실력은 되는 것 같네’ 하고 바로 합격점을 주셨다. 이 과에서 다루는 게 시각디자인이 아닌 제품디자인이라는 것을 재차 확인하셨다. 나는 제품 디자인을 하고 싶다고 끄덕거렸다. 이후 내가 이 과를 포기하게 된 이유가 제품과 안 맞아서라는 점은 정말 죄송하게 생각한다. 그땐 이렇게 안 맞을지 몰랐거든요...




크로키 - 인쇄 광고(공모전 출품작) -일러스트 연습

이제 내 포트폴리오의 구성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분명히 있었다. 1. 나 그림 그릴 줄 압니다. 2. 나 포토샵 쓸 줄 압니다. 3. 사실 일러스트도 쓸 줄 압니다. 4. 디자인 나름 깊게 생각해보고 온 겁니다.


손으로 그린 것과 디지털로 그린 것 등이 골고루 포함되었다. 어차피 내가 만든 작품은 한정적이었으니 분량에 따라 적절히 나누었다. 드로잉 - 편집 디자인 - 포스터 디자인 - 광고 디자인 - 일러스트레이션.

쓰고 보니 면접에서 왜 이 과가 시각디자인과가 아님을 심각하게 이야기했는지 알 것 같다. 면접장에선 어떻게 어필했냐면, 그동안 제품디자인을 시도해볼 기회는 전혀 없어서 이런 작업밖에 할 수 없었다, 최근에 <나는 3D다>라는 산업디자인 책을 인상 깊게 읽었다,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건 제품인 것 같다, 등등. 다시 한 번 학과장님께 죄송하다.




글이 빽빽했던 내 포트폴리오


내 포트폴리오는 글이 많았다. <드로잉> 파트라 하면 드로잉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를 시기별로 이야기했다. <편집 디자인>이나 <포스터 디자인> 파트에서는 그 계기를 작업물에 대한 간단한 소개와 엮었다. 디자인이 내게 가지는 의미도 깊게 고민했음을 어필했다. 여기 “디자인은 자아실현의 과정이었다”라고 적혀있다.

<광고>와 <일러스트레이션> 파트로 갈수록 공공디자인에 대한 생각을 풀어나갔다. 그냥 디자인 말고, 의미 있는 디자인을 하고 싶다는 이야기였다. 조금 욕심을 내서 내 전공과도 연결고리를 만들어내고 싶었던 것 같다. 나는 이제 와서 뒤늦게 디자인을 하고 싶은 사람이 아니라, 원래부터 디자인을 하려던 사람이었다고 말하고 싶었다. 국문학이라는 전공도 디자인을 하기 위한 한 과정에 있는 일이었다고. (지금 생각해보면 디자인조차도 하나의 과정이었던 것을)


자기소개서에 분량 때문에 미처 넣지 못한 이야기도 모두 집어넣었다. 꼼꼼히 읽지 않아도 괜찮았다. 인문학적 디자인에 대한 부분은 나름 흥미를 가지고 물어봐주셨다. 이건 잘 대답할 수 있었다. 서울대 디자인과를 꿈꿀 때 열심히 준비했던 내용이었다. 물론 입시를 떠나서 고등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변치 않아온 내 나름의 철학이기도 하다.



디자인은 자아실현의 과정이었다


그렇게 나의 첫 포트폴리오는 작품의 퀄리티보다는 열정과 패기로 가득 차 있었다. 어딘가 어설픈 작업물들, 생각이 많아 길어진 글들, 별 볼일 없이 넘어간 40페이지 분량.

나이만큼 조금(미세하게) 더 정확해진 눈으로 바라보면 디자인보다는 글에 더 재능이 있어 보이기까지 한다. 아무렴 어떤가, 글과 디자인은 모두 다 내가 포기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포트폴리오의 본래 정의는 ‘자신의 능력과 개성을 보여줄 수 있는 작품집’이다.

첫 포트폴리오를 만드는 동안에도 내 나름의 ‘능력과 개성’에 대한 고민이 있었다. 디자인 능력과 감각도 중요하지만 여기에는 꾸준함이나 진지함, 성실함, 열정 등에 대한 정보도 담겨 있었다. 앞으로 취직을 준비할 때의 포트폴리오는 절대 이렇게 만들 수 없을 것이다. 나에 대한 고민이 상대방(학교/회사)에 대한 고민을 능가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 포트폴리오는 결과적으로 통과된(성공한) 포트폴리오였으며, 나에게 중요한 지침이 된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아주 중요한 정보들이 이 안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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