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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늬 Mar 06. 2020

[사원 일기] 기획자의 숙명 '피드백'에 대한 소회

일 잘하는 사람은 피드백을 '없애는' 게 아니라 '줄이는' 데 주력한다.


운영 부서에서 깍두기 에디터로 1년을 일하다가, 최근에 제작 부서로 이적했다. 그리고 새 프로젝트에 투입된 지 두 달이 된 오늘, 처음으로 받은 주님(광고주)의 기획안 피드백. 브랜드 내부 담당자 중 가장 뉴미디어 콘텐츠에 대한 이해도가 높은 H의 메일이었다. 기존에 보낸 두 개의 기획이 1안은 콘셉트가 좋고, 2안은 구성이 좋으니 이를 믹스해서 하나로 만들어보면 어떻겠냐는 제안. 


메일로 설명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는지 이내 두 차례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어와 출연자 섭외 진행 상황과 수정되어야 할 콘텐츠 진행 방향에 대해 이야기해주었다. 대행사를 대하는 '주님'들의 평균적인 태도를 볼 때, 기획 하나를 두고 이 정도의 스킨십을 먼저 해준다는 것은 보기 드문 친절이다. 


그렇게 담당자와 10분 남짓 통화하는 동안 수정될 기획안의 큰 흐름은 물론 콘텐츠 타이틀 콘셉트까지 전부 나왔다. "네, 그럼 이렇게 반영해서 다시 회신드리도록 하겠습니다."하고 끊은 전화. 긴장감이 몰려왔다. 덜컥 겁이 났기 때문이다. 피드백에 '네'라고 대답한 순간 그것은 피드백을 준 사람에 대한 약속이 된다. 내가 그로부터 받아낸 얘기들을 정확하게 밀착시켜서, 다시 전달할 2차 결과물은 그 사람의 머릿속에 그려져 있을 모습과 완벽히 일치해야 하는 것이다. 


전화하면서 메모도 했고, 머릿속에 정리도 다 됐으니 옮기기만 하면 되는데. 갓 솜털이 빠지기 시작한 병아리 에디터로서 광고'주'와 일대일로 커뮤니케이션한 게 처음이고, 이 '약속'에 대한 책임감이 새삼 무거워 손이 굳었다. 하지만 안 해본 것, 처음인 것 앞에서 늘 얼어붙고 보는 내 스타일 이젠 아니까. 크게 심호흡 한 뒤 일부러 슬렁슬렁, 차근차근 일해서 퇴근 한 시간 전 2차 기획안을 완성하고 과장님께 한 번에 오케이 받았다. 그리고 다시 주님께로 토스. 식은땀이 났던 것도 같다. '내일 오전에 이 사람이 메일 열어보고 나서 당황하는 건 아니겠지?' '나 맞게 수정한 거겠지?' '내가 그렇게까지 바보 천치는 아닐 거잖아, 그치?' 하는 공포 때문에 말이다.


결국 요즘의 나는 '피드백'의 중요성과 그로부터 파생되는 '진짜 실력'에 대한 물음들을 자꾸 곱씹게 된다. 그럴싸한 초안 한 개를 만드는 것보다 덜어내고 깎아낼 것들이 명쾌하게 보이는 기획을 많이, 빠르게 만들어내는 게 중요하다는 것. 기획은 다이아몬드와 같은 것이다. 까이고 깎일수록 빛난다. 진짜 실력이란 1) 피드백을 얼마나 유연하고 빠르게 받아들이고 이해할 수 있는지, 2) 피드백 내용을 2차 결과물에 얼마큼 잘 반영해 3차, 4차로 이어지는 피드백 핑퐁을 줄일 수 있는지 에서 드러난다. 완벽한 기획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차피 고쳐야 할 건데, 피드백이 두려워 혼자 입 안에 물고 있으면 반드시 썩는다.


전엔 그걸 몰랐다. 싫은 소리 듣기 싫어하는 자존심 센 성격, 내가 만족하기 전까지는 절대 바깥에 오픈하지 못하는 완벽주의 때문에 언제나 나의 기획과 초안을 그대로 관철시키는 데 모든 목표와 에너지가 집중되어 있었다. 모 매체 소속 에디터로 있었을 때, 몇 개월 걸려 꼴랑 한 기사를 겨우 토해내는 게 '내 이야기'를 해야 해서 그런 거라고, 즉 손에 실어증이 온 거라고 스스로에게 둘러댔었는데. 생각해보면 그때 나는 문장을 잃은 것이 아니라 욕먹기 싫었던 것 같다. 방어적으로 일하니 언제나 남들보다 느렸고, 들이는 노력에 비해 성장이 더뎠다. 지금 아는 것들을 그때에도 알았더라면.


진짜 일 잘하는 기획자는 피드백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줄이는 데' 주력한다. 없애는 것과 줄이는 것의 차이가 무엇인지는 앞에서 설명했고. 꼭 콘텐츠뿐만이 아니라, 모든 일을 하는 데 있어 완성된 결과물이 나오기까지의 프로세스는 한 사람의 역량이 단계별로 발현되는 타임라인이다. 한 번 더 비유를 하자면 기획과 초안은 타고난 감각의 배열에 불과하고, 진짜 '실력'은 피드백을 받는 순간부터라는 것이다. 엉뚱한 단계에서 힘을 쏟아버리면 진짜 실력을 발휘해야 할 단계에서 쓸 에너지가 없다. 그리고 그만큼 나의 성장도 미뤄진다.


상급자로부터 1)'어떤' 피드백을 받느냐. 그리고 2) 피드백의 내용을 얼마큼 정확하게 이해하고 반영하느냐. 성장할 수 있는 기획자의 잠재력은 바로 거기서 판가름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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