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면의 고요함을 되찾는 언어의 힘
오늘 하루, ‘괜찮다’는 말을 몇 번쯤 하셨나요? 정말 괜찮아서 한 말일 수도 있지만, 어쩌면 마음속 소란스러움을 급하게 덮으려는 방패막이였을지도 모릅니다. 쉴 틈 없이 울리는 메신저 창을 닫으며, 혹은 또 하나의 회의를 마치고 자리로 돌아오며, 우리는 종종 마음과 다른 말을 합니다.
이상하게도, 일이 힘든 것보다 이 ‘말과 마음의 불일치’가 우리를 더 깊은 피로감으로 몰아넣곤 하죠. 스스로를 속이고 있다는 미묘한 자각, 혹은 내 감정을 제대로 돌보지 못했다는 찜찜함 같은 것들입니다.
밤에 홀로 남았을 때 문득 그런 생각이 듭니다. “나는 왜 자꾸 이런 말을 하게 될까?” 스스로에게 만족스럽지 못한 말을 내뱉은 날이면, 자책감이 밀려오기도 합니다. ‘그때 그렇게 말하지 말걸…’ 하는 후회는 덤입니다.
우리는 말이 그저 생각을 담아내는 그릇이라고 여기지만, 어쩌면 그 반대일지도 모릅니다. 말이 생각의 모양을 빚어내는 틀이 되고, 감정의 물길을 내는 작은 삽이 되는 것이죠. 당신이 무심코 던진 말이, 사실은 당신 마음의 방향을 정하는 나침반 역할을 하고 있었다면 어떨까요?
이 글은 화려하게 말하는 기술(화술)에 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대신, 우리가 일상에서 사용하는 말의 미세한 ‘결’을 함께 관찰해보자고 제안합니다. 말이 어떻게 우리의 감정과 인식을 조종하는지, 그리고 그 말의 방향을 바꾸는 것만으로도 어떻게 내면의 고요함을 되찾을 수 있는지에 대한 탐구입니다.
우리는 왜 ‘괜찮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까요? 아마도 그편이 가장 빠르고 쉬운 방어기제이기 때문일 겁니다. 내 감정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에너지가 드는 일이고, 때로는 상대방에게 부담을 줄까 봐, 혹은 내 약점을 드러내는 것 같아 두렵기도 하죠.
하지만 이 ‘괜찮다’는 말은, 사실 내면의 작은 신호들을 무시하겠다는 선언과도 같습니다. 심지어 우리 사회는 ‘긍정 강박(Toxic Positivity)’이라는 이름으로 이런 태도를 부추기기도 합니다. “힘들어도 긍정적으로 생각해야지”, “다 잘될 거야” 같은 말들은 위로처럼 보이지만, 종종 “너의 그 부정적인 감정은 틀렸어”라는 암묵적인 검열로 작동합니다.
언어학에는 ‘사피어-워프 가설(Sapir–Whorf hypothesis)’이라는 흥미로운 이론이 있습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가 우리의 사고방식과 세계를 인식하는 틀을 결정한다는 가설이죠. 조금 거창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일상의 사소한 순간에 이 가설은 놀랍도록 정확하게 맞아떨어집니다. 우리가 스스로의 감정을 표현할 단어를 ‘괜찮다’와 ‘죽겠다’ 두 가지로만 제한한다면, 그 사이의 미묘한 감정들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되어버립니다.
가장 흔한 예를 들어볼까요. 누군가 당신에게 “요즘 어때요?”라고 물었을 때, 두 가지 대답이 있습니다.
A: “아, 괜찮아요. 그냥 뭐… 늘 똑같죠.”
B: “솔직히 조금 지쳤어요. 일이 몰려서 며칠 무리했거든요.”
A의 대답은 소통의 문을 닫습니다. ‘괜찮다’는 말로 감정의 표면을 코팅해버리는 순간, ‘나’는 물론 ‘상대방’도 더 이상 내 마음에 접근할 수 없습니다. 스스로도 ‘아, 나는 괜찮은 거구나’라고 애써 외면하게 되죠. 감정은 해소되지 않고 그저 억눌릴 뿐입니다.
반면 B의 대답은 문을 엽니다. ‘조금 지쳤다’고 인정하는 순간, 감정은 비로소 구체적인 이름을 얻습니다. 신경과학에서 말하는 ‘감정 명명(Name it to tame it)’의 효과입니다. 막연했던 피로감은 ‘며칠간의 무리’라는 명확한 원인과 연결됩니다. 이것만으로도 감정의 온도는 달라집니다. 펄펄 끓던 압력솥의 김을 살짝 빼주는 효과랄까요.
내 감정을 언어로 ‘인정’해주는 것. 그것이 감정 조절의 첫걸음입니다. 우리는 종종 감정을 억누르는 것과 다스리는 것을 혼동합니다. 단어 하나를 바꾸는 것은 억압이 아닌, 다스림의 시작입니다. 이것이 이 글에서 말하고자 하는 ‘감정 조율(Emotional Tuning)’의 첫 단계입니다. 당신은 오늘, 당신의 감정에 어떤 단어를 붙여주었나요?
타인에게 하는 말보다 어쩌면 더 무서운 것은, 우리가 스스로에게 무심코 던지는 말들입니다. 특히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았을 때, 우리 머릿속에는 자동적으로 특정 문장들이 떠오릅니다.
“또 실수했네. 난 역시 안 돼.”
“이것밖에 못 하나?”
“분명 망할 거야.”
솔직히 말해서, 이런 말들은 우리가 의식적으로 선택한 말이 아닙니다. 너무 오랫동안 반복해서 사용한 나머지, 거의 반사작용처럼 튀어나오는 ‘습관’이죠. 이것이 바로 인지행동치료(CBT)에서 말하는 ‘자동적 사고(Automatic Thoughts)’의 가장 강력한 증거입니다. 이 말들은 단순히 지금의 감정을 표현하는 데 그치지 않고,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라는 자기 인식을 빚어내는 재료가 됩니다.
이 자동화된 언어 습관은 강력한 ‘감정의 피드백 루프(Feedback Loop)’를 만듭니다.
(1) “난 역시 안 돼”라는 말을 한다.
(2) 이 말은 불안감과 무력감을 자극한다. (감정의 입력)
(3) 불안감과 무력감은 다음 행동을 위축시킨다.
(4) 그리고 다시 “난 역시 안 돼”라는 말을 강화한다. (감정의 출력)
이 고리 안에서 말은 원인이자 결과가 됩니다. 우리가 스스로를 가두는 ‘언어적 감옥’이랄까요. 이 감옥은 너무나 익숙해서, 우리는 종종 자신이 그 안에 갇혀있다는 사실조차 잊고 삽니다.
그렇다면 이 고리를 어떻게 끊을 수 있을까요? 인지행동치료는 이 ‘자동적 사고’를 ‘인지적 재구조화’를 통해 바꿀 수 있다고 말합니다. 저는 이것을 ‘언어적 재구조화’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생각을 통째로 바꾸긴 어려워도, 말은 지금 당장 바꿀 수 있으니까요.
여기 두 가지 다른 자기 대화가 있습니다.
A: “또 실수했네. 역시 난 안 되나 봐.”
B: “이번엔 이 방법으로 시도해봤네. 원하는 결과는 아니었지만, 이건 알게 됐어.”
A는 ‘나’라는 존재 자체에 대한 단정적 평가입니다. ‘실수’와 ‘나’를 동일시하죠. 이 말을 반복하면 ‘나는 실수하는 존재’라는 자기 인식이 강화될 뿐입니다.
B는 ‘나’와 ‘행위(시도)’를 분리합니다. ‘실패’ 대신 ‘시도’와 ‘결과’라는 중립적인 단어를 사용합니다. 그리고 ‘배움’이라는 새로운 관점을 찾아냅니다. 이것은 억지로 긍정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사실을 왜곡하지 않으면서도, 나를 파괴하지 않는 언어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이 작은 언어적 전환이, 감정의 피드백 루프를 끊는 가장 강력한 스위치가 됩니다.
말이 마음의 방향을 바꾼다는 것을 알았다면, 이제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다시 말하지만, 이 글은 청산유수 같은 화술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타인에게 잘 보이기 위한 말이 아니라, 나의 정신 건강을 위한 ‘내면의 언어 위생(Language Hygiene)’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위생’이라는 단어를 쓴 이유는, 이것이 일회성 이벤트가 아니라 매일의 습관이기 때문입니다. 아침저녁으로 양치질을 해서 구강 위생을 관리하듯, 내면의 말을 의식적으로 다듬고 정화하지 않으면 마음에는 금세 ‘충치(우울감, 자기 비난)’가 생깁니다.
이 ‘언어 위생’은 곧 ‘감정 조율’ 작업이기도 합니다. 먼지가 낀 기타 현을 닦아내고(위생), 다시 팽팽하게 조이면(조율), 비로소 맑은 소리가 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의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심코 쓰던 낡은 말, 나를 갉아먹던 말을 닦아내고 정돈할 때, 마음의 음정이 다시 정확하게 맞춰집니다.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아주 사소한 것부터 시작할 수 있습니다.
첫째, 감정에 구체적인 이름 붙이기 (Naming)
‘그냥 힘들다’, ‘짜증 난다’처럼 뭉뚱그려진 말 대신, 감정의 결을 세분화해 보세요. “나는 지금 (일이 많아서) 지친 걸까, (기대했던 일이 틀어져서) 실망한 걸까, 혹은 (그 사람의 말에) 억울한 걸까?”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보는 겁니다. 음… 어쩌면 셋 다일 수도 있죠. 이렇게 감정을 명료하게 이름 붙이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감정에 압도당하는 대신 감정을 관찰할 수 있게 됩니다.
둘째, 단정 대신 질문형으로 바꾸기 (Questioning)
우리를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은 부정적인 ‘단정’입니다. “난 안 될 거야”, “이건 불가능해.” 이런 자동화된 말이 떠오를 때, 의식적으로 문장 끝에 물음표를 붙여보세요.
“난 안 될 거야” → “정말 안 될까? 어떻게 하면 될 수 있을까?”
“이건 불가능해” → “지금 당장은 불가능한가? 가능한 방법은 없을까?”
단정은 생각을 닫지만, 질문은 생각을 엽니다. 꽉 막혔던 마음에 작은 틈을 내는 것과 같습니다.
셋째, ‘나’와 ‘감정’ 분리하기 (Observing)
우리는 종종 “나는 우울하다” 또는 “나는 불안한 사람이다”라고 말합니다. 이는 ‘나=우울’, ‘나=불안’이라는 등식을 만듭니다. 대신 이렇게 말해보는 건 어떨까요?
“나는 지금 우울감을 느낀다.”
“나는 지금 불안함을 경험하고 있다.”
‘나’라는 주어와 ‘우울감/불안함’이라는 객체 사이에 거리를 두는 것입니다. 감정은 내가 아니라, 나를 잠시 스쳐 가는 손님일 뿐이라는 것을 언어를 통해 스스로에게 상기시키는 것이죠.
결국, 모든 것은 ‘결의 물리학’으로 귀결됩니다.
이 글은 “말은 마음의 표면이다. 표면의 결이 바뀌면, 흐름의 방향도 바뀐다”는 전제에서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반복적으로 사용하는 무의식적 언어 습관(결)은, 우리의 고착화된 감정 패턴(흐름)을 만듭니다. 그리고 그 감정의 흐름은, 우리 삶의 선택과 자기 인식(방향)을 결정합니다.
우리는 “나는 왜 자꾸 이런 말을 할까?”라고 자책하며 출발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그 답을 압니다. 그것은 우리가 나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낡은 ‘언어 습관’과 ‘자동적 사고’에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익숙함의 고리는 ‘언어 위생’이라는 의식적인 선택으로 충분히 끊어낼 수 있습니다.
말의 결을 다듬는다는 것은, 나 자신을 속이거나 억지로 긍정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내 감정을 더 섬세하게 들여다보고, 나를 파괴하지 않는 언어로 ‘인정’해주는 행위입니다.
가장 큰 변화는 아마도 ‘내면의 고요함’일 것입니다. 스스로를 비난하고 다그치던 내면의 목소리가 잦아들 때, 우리는 비로소 진짜 중요한 것에 에너지를 쓸 수 있게 됩니다. 내가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느껴야 하는지요.
이 고요함은 자연스럽게 관계로 확장됩니다. 자신의 감정을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은, 타인의 감정 또한 넉넉하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괜찮다’는 방어막 뒤에 숨는 대신, “조금 지쳤다”고 솔직하게 말할 수 있을 때, 관계는 비로소 깊어지기 시작합니다.
당신의 하루를 채우는 말들을 한번 살펴보세요. 그 말들은 당신을 어디로 이끌고 있나요?
말의 방향을 바꾸는 것은 거창한 혁명이 아닙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 단어 하나를 신중하게 고르는 작은 선택입니다. 그 작은 선택이 모여 당신의 결이 되고, 흐름이 되고, 결국에는 당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삶을 이끌어갈 것입니다. 당신의 말이, 당신의 마음에게 가장 다정한 길이 되어주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