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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 사람만 나를 힘들게 할까

관계의 거울로 나의 그림자를 읽는 법

by 하레온

왜 우리는 유독 그 사람에게만 반응할까?


우리 모두에게는 그런 사람이 한 명쯤 있습니다. 이상하게도 그 사람의 말 한마디, 작은 몸짓 하나에 감정이 요동치는 사람.


어떤 상사는 괜찮은데 유독 그 팀장의 말에만 울컥 화가 치밀고, 어떤 친구는 괜찮은데 유독 그 친구의 자랑에만 속이 배배 꼬입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한없이 관대해지다가도, 유독 그 사람에게만은 바늘 끝처럼 예민해지는 나를 발견합니다.


왜일까요?


우리는 습관처럼 그 이유를 밖에서 찾습니다. "그 사람 성격이 유별나서", "나와는 그냥 맞지 않아서"라고 선을 그어버리죠. 하지만 정말 그것뿐일까요? 만약 그렇다면, 왜 우리는 시간이 지나 다른 장소에서, 비슷한 유형의 사람에게 또다시 똑같은 감정의 덫에 걸려드는 걸까요.


그 사람이 밉다면, 어쩌면 그 안에는 당신이 애써 외면하고 있는 당신의 일부가 숨어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 글은 '타인과의 소통법'을 말하지 않습니다. 대신, 관계 속에서 반복되는 불편한 감정들을 통해 '나 자신을 해석하는 과정'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당신을 뒤흔드는 그 관계야말로, 당신이 외면했던 내면의 그림자를 만날 가장 선명한 거울이기 때문입니다.


그 거울을 정면으로 마주할 용기가 있다면, 당신은 더 이상 관계에 휘둘리지 않고 스스로 중심을 잡는 '자기 이해'의 문을 열게 될 것입니다.




1부: 모든 관계는 나의 그림자를 비춘다

Image_fx - 2025-10-20T204631.589.jpg 한 사람에게 비춘 조명이 벽에 거대하고 복잡한 그림자를 만들며 '투사'를 상징하는 흑백 이미지.


우리는 모두 가면을 씁니다. 사회생활을 하고, 관계를 맺기 위해 '적절한 나'를 연기하죠. 심리학에서는 이런 가면을 '페르소나(Persona)'라고 부릅니다. 친절한 동료, 책임감 있는 팀원, 다정한 연인... 이 가면들은 우리가 세상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도구입니다.


문제는, 그 가면 뒤에 숨겨진 것들입니다.


'그림자(Shadow)'는 이 페르소나의 정반대편에 존재합니다. 내가 "나는 이런 사람이야"라고 스스로를 규정할 때, 그 정의에 포함되지 못한 모든 특성. 내가 외면하고, 억압하고, 심지어 경멸하는 '나의 또 다른 모습'이 바로 그림자입니다.


'나는 늘 합리적이고 이성적이야'라는 가면을 쓴 사람은, 자신의 감정적이고 유치한 면, 충동적인 면을 그림자 속으로 밀어 넣습니다. '나는 착하고 배려심 깊은 사람이야'라는 가면 뒤에는, 이기적이고 싶은 욕구, 거절하고 싶은 단호함이 그림자로 숨어듭니다.


이 그림자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저 내 무의식 깊은 곳에 웅크리고 있다가, 가장 예상치 못한 순간에 엉뚱한 방식으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냅니다. 바로 '투사(Projection)'를 통해서입니다.


투사란, 내 안의 그림자를 내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비추어 보는 것입니다. 마치 내 무의식이라는 영사기가 '나의 그림자'라는 필름을, '상대방'이라는 스크린에 쏘아 올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가장 억압한 것들을 타인에게서 발견할 때 가장 크게 분노합니다.


만약 당신이 '무능함'을 병적으로 싫어하고, 그런 모습을 조금이라도 보이는 동료를 견디지 못한다면, 혹시 당신 안에 '무능해질까 봐 두려워하는 나' 혹은 '사실은 무능한 나의 일부'를 꽁꽁 숨겨두고 있는 건 아닐까요?


만약 당신이 '인정받고 싶은 욕구'를 천박하다고 억압했다면, 어떻게든 인정을 받으려 애쓰는 사람을 볼 때마다 경멸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왜 저렇게까지 해?"라고 혀를 차지만, 사실 그건 당신이 그토록 원했지만 스스로 허락하지 않았던 욕구의 그림자일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이 싫은 게 아닙니다. 당신은 그 사람에게 비친 '당신의 그림자'가 싫은 겁니다.


그렇기에 관계 속의 갈등은 고통스럽지만, 동시에 엄청난 기회입니다. 그 불편한 감정이야말로 나를 통합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단서이자, 내면의 그림자가 "나 좀 봐달라고! 나도 너의 일부란 말이야!"라며 보내는 다급한 신호입니다.




2부: 그림자에게 말을 거는 시간

Image_fx - 2025-10-20T204708.190.jpg 한 사람이 흐릿한 그림자 형상과 마주 앉아 대화하는 듯한, '내면과의 대화'를 상징하는 라인 아트.


그림자를 인식했다면, 이제 그 그림자에게 말을 걸어야 할 시간입니다. 밖으로 향하던 시선을 안으로 돌려, 내 감정의 진짜 주인을 찾아야 합니다.



사례 1: 사사건건 통제하려는 김 팀장 (직장)


"김 팀장님만 보면 숨이 막혀요. 저를 사사건건 통제하고, 작은 실수도 용납하지 않아요. 그 사람의 완벽주의적인 태도에 질식할 것 같아요."



그림자와의 대화: 김 팀장에게 느끼는 그 '질식감'은 누구의 것입니까? 어쩌면 당신은 스스로에게 엄청난 '통제광'일 수 있습니다. 삶이 내 뜻대로 흘러가지 않을까 봐, 실수할까 봐 전전긍긍하며 스스로를 옭아매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김 팀장은 당신 내면의 그 '엄격한 통제자'를 밖으로 보여주는 거울일 뿐입니다. 혹은 정반대일 수도 있습니다. 당신 안에 '모든 것을 내던지고 자유로워지고 싶은 욕구'(그림자)가 있는데, 그것을 억압하고 있기에 김 팀장의 '통제'(자유의 억압)가 유독 더 폭력적으로 느껴지는 것일 수 있습니다.



사례 2: 늘 나를 서운하게 만드는 연인 (연애)


"저는 정말 최선을 다하는데, 제 연인은 늘 무심해요. 사소한 걸 기억 못 하고, 제 감정을 먼저 알아주지 않죠. 그럴 때마다 너무 서운해서 폭발하게 돼요."



그림자와의 대화: 그 '서운함'은 어디에서 왔을까요? 당신은 '헌신'이라는 가면 뒤에, '이기적으로 사랑받고 싶은 나', '먼저 요구하고 싶은 나'라는 그림자를 숨기고 있진 않나요? 당신이 억압한 그 그림자가 연인의 '무심함'(요구에 부응하지 않음)을 만날 때마다 "왜 내 그림자를 무시해!"라며 분노하는 것입니다. 연인에게 서운함을 느끼는 순간은, 당신이 당신의 욕구를 스스로에게 솔직하게 고백해야 할 시간이라는 신호입니다.



사례 3: 늘 나를 초라하게 만드는 친구 (친구/동료)


"그 친구는 늘 나보다 한발 앞서 나가요. 잘나가는 것 같고... 무의식중에 비교하게 되고, 질투심이 들 때면 스스로가 너무 초라해져요."


그림자와의 대화: 그 '질투'와 '초라함'은 무엇을 말하고 싶을까요? 그것은 사실 "나도 더 성장하고 싶다", "나도 저렇게 빛나고 싶다"는 당신 내면의 강렬한 욕구가 보낸 신호일 수 있습니다. 당신이 애써 외면했던 '성장 욕구'라는 그림자가 친구를 통해 "이제 나를 좀 봐줘!"라고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감정이 격해지는 순간, 우리는 밖으로 향하던 화살을 안으로 돌려야 합니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질문해야 합니다.


(상대가 아닌 나에게) "내가 지금 느끼는 이 감정의 진짜 이름은 무엇인가?" (분노인가? 서러움인가? 수치심인가? 혹은... 질투인가?)


"이 감정이 나에게 익숙한 감정인가? 과거에도 비슷한 일로 이렇게 힘들었나?" (지금 이 감정은, 어쩌면 아주 오래전부터 반복된 나의 패턴일 수 있습니다.)


"내가 상대의 어떤 점 때문에 이렇게 화가 났지? ...혹시 그 모습이 내가 그토록 숨기고 싶었던, 혹은 내가 그토록 되고 싶었던 나의 모습은 아닐까?"



이 질문의 끝에서 우리는 그림자와 화해하는 '수용의 언어'를 연습해야 합니다.


(나서는 친구가 꼴 보기 싫을 때)


"아... 나도 사실 저렇게 주목받고 싶고 인정받고 싶었구나. 그 욕구를 내가 너무 외면했네."


(실수하는 동료가 미울 때)


"나도 사실 완벽하게 해내지 못할까 봐 두려워. 실수할까 봐 불안해. 그 마음, 나도 알아."


그림자를 마주한 사람은 더 이상 외부에서 구원자를 찾지 않습니다. 그들은 타인이라는 거울을 통해 스스로 자신의 빛이 되는 법을 배웁니다.




에필로그: 내 안의 어둠과 화해하는 법


우리는 타인을 통해 나를 미워하고,


또 타인을 통해 나를 사랑하는 법을 배웁니다.


관계의 소용돌이가 지나간 자리에는,


상처받은 타인이나 원망스러운 내가 아니라,


그저 '나의 그림자'가 서 있습니다.


그토록 나를 불편하게 했던 그 사람들은, 어쩌면 나 자신과 화해할 기회를 주기 위해 찾아온 가장 혹독한 메신저였을지 모릅니다.


관계의 끝에는 언제나 '나'가 있습니다.


그림자를 이해한다는 건,


내 안의 어둠을 억지로 걷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그 어둠 역시 나의 소중한 일부임을 인정하고,


그 어둠까지 끌어안는 것입니다.


그림자를 이해한다는 건,


결국 나를 온전히 사랑하는 연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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