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쓰지 않고 흙탕물 같은 마음을 투명하게 만드는 고요의 기술
우리는 행복해야 한다는 강박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서점에 가면 긍정적인 생각으로 인생을 바꾸라는 책들이 쏟아지고, 소셜 미디어는 타인의 화려하고 충만한 순간들로 도배되어 있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우울함은 일종의 실패처럼 느껴집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이유 없이 가슴이 무겁거나, 한낮에 문득 텅 빈 기분이 들면 우리는 본능적으로 당황합니다. 그리고 곧바로 자신을 다그치기 시작합니다. 왜 또 이러지. 이러면 안 되는데. 빨리 기운을 차려야 해.
우리는 우울이라는 감정이 찾아오면 그것을 내면의 시스템에 침투한 바이러스나 오류 코드처럼 취급합니다. 그래서 가능한 한 빨리 백신을 투여해 제거하려고 애를 씁니다. 친구들을 만나 억지로 웃으며 수다를 떨거나, 맛있는 음식을 먹거나, 혹은 스마트폰 속의 긍정적인 명언들을 강박적으로 찾아 읽습니다. 심지어 기분이 나아지지 않는 자신을 보며 나는 왜 이렇게 나약할까 하고 자책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바로 그 애씀이 우리를 더 깊은 수렁으로 밀어 넣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물에 빠졌을 때 가장 위험한 행동은 살기 위해 마구잡이로 허우적거리는 것입니다. 그 격렬한 몸부림은 몸에 힘을 들어가게 하고, 호흡을 가쁘게 만들며, 결국 더 빠르게 물 아래로 가라앉게 만듭니다. 마음의 문제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이 있습니다. 이 글에서 다루는 우울은 의학적 치료가 시급한 임상적 우울장애와는 결을 달리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우울은 누구나 살면서 주기적으로 마주하는 감정적 저조기, 즉 내면의 흐린 날씨를 의미합니다. 병원에 가야 할 정도는 아니지만 일상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그 묵직한 회색빛 감정에 대해 이야기하려 합니다.
우리가 우울과 싸우다 지치는 이유는 감정의 본질을 오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감정을 통제 가능한 대상으로, 그리고 항상 쾌적한 상태로 유지해야 할 의무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이 글은 그 착각을 걷어내고, 우울과 싸우지 않고도 평온해질 수 있는 제3의 길을 제안하려 합니다.
감정은 고정된 실체가 아닙니다. 그것은 물리학적인 파동에 가깝습니다. 기쁨이 영원할 수 없듯, 슬픔이나 우울 또한 영원할 수 없습니다. 뇌과학적으로 보면 어떤 강렬한 감정도 그 생화학적 수명은 길어야 90초라고 합니다. 외부 자극에 의해 분비된 스트레스 호르몬이 혈관을 타고 흐르다 분해되어 사라지는 데 걸리는 시간이 대략 그 정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의 우울은 며칠, 아니 몇 달씩 지속되는 걸까요? 그것은 우리가 지나가는 파도를 붙잡아두기 때문입니다. 파도가 밀려올 때 우리는 그저 파도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파도에 휩쓸리지 않으려 댐을 쌓고 벽을 세웁니다. 왜 파도가 치는 거야, 파도가 오면 안 돼, 라고 거부하며 온몸으로 저항합니다. 이 저항이 바로 애씀입니다.
자연을 한번 떠올려 봅시다. 우리는 비가 오거나 눈이 올 때 하늘을 원망하며 날씨를 바꾸려 들지 않습니다. 그저 우산을 펴거나 옷을 두껍게 입으며 날씨에 적응할 뿐입니다. 날씨가 흐리다고 해서 하늘이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마음이 흐리다고 해서 당신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우울은 당신이라는 내면의 생태계에 찾아온 계절의 변화, 혹은 기압골의 영향일 뿐입니다.
에너지가 외부로 발산되는 여름이 있다면, 에너지를 내부로 갈무리하고 휴식하는 겨울도 반드시 필요합니다. 우울은 어쩌면 당신의 몸과 마음이 지금은 잠시 멈추어 쉴 때라고 보내는 절전 모드 신호일지도 모릅니다. 기계도 과열되면 전원을 차단하듯, 우리 뇌도 감당하기 힘든 자극이나 피로가 누적되면 감정의 스위치를 내리고 차분해지기를 요구합니다. 그것이 무기력과 우울의 형태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울함이 찾아왔을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죄책감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당신이 게을러서, 당신이 부정적이어서 우울한 것이 아닙니다. 그저 파도가 칠 시간이 되어 파도가 쳤을 뿐입니다. 바다에 파도가 치는 것에 선악의 도덕적 잣대를 댈 수 없듯이, 당신의 감정에도 윤리적 판단을 내릴 필요가 없습니다. 이것은 그저 현상입니다.
감정이 단순한 자연 현상임을 이해했다면, 이제 그 자연 현상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를 다시 살펴볼 차례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너무 열심히 싸워왔습니다. 그리고 그 싸움의 방식이 틀렸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심리학자 다니엘 웨그너는 아주 흥미로운 실험을 했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흰색 곰을 생각하지 말라고 지시했습니다. 결과는 어땠을까요? 사람들은 다른 어떤 것보다 흰색 곰을 더 자주, 더 강렬하게 떠올렸습니다. 이를 사고 억제의 역설이라고 부릅니다. 인간의 뇌는 어떤 생각을 하지 않으려 노력할 때, 그 생각이 제대로 억제되고 있는지 감시하기 위해 끊임없이 그 대상을 소환합니다.
우울을 떨쳐내려 애쓰는 과정도 이와 똑같습니다. 우울하지 말아야지, 기분이 좋아져야지라고 다짐할수록 우리 뇌는 현재의 우울한 상태를 더욱 선명하게 자각합니다. 억지로 밝은 척하며 사람들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더 큰 공허함이 밀려오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감정을 억누르려 할수록 그 반작용으로 감정은 더욱 증폭됩니다.
우리가 겪는 고통은 두 가지 층위로 나뉩니다. 첫 번째 화살은 우울이라는 감정 그 자체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피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두 번째 화살은 우울해하는 나 자신을 한심하게 여기는 판단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쏘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 첫 번째 화살보다 두 번째 화살이 훨씬 더 아프고 치명적입니다. 스토아 철학에서는 이를 통제의 이분법으로 설명합니다. 감정이 일어나는 것은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외부적 사건과 같지만, 그 감정을 대하는 태도는 우리가 통제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혼란스러울 때는 흙탕물이 든 컵과 같습니다. 이 물을 맑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손을 넣어 휘젓거나 억지로 흙을 건져내려 하면 물은 더욱 탁해질 뿐입니다. 유일한 방법은 컵을 가만히 탁자 위에 올려두는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흙은 바닥으로 가라앉고, 물은 저절로 투명해집니다. 우리의 마음도 이와 같습니다. 애써서 휘젓는 것을 멈추는 순간, 비로소 회복은 시작됩니다.
이 글이 말하는 화해란 우울을 억지로 좋아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우울과 싸우는 것을 멈추라는 뜻입니다. 당신의 내면이라는 집에 원치 않는 불청객이 찾아왔다고 상상해 봅시다. 당신이 문을 걸어 잠그고 들어오지 못하게 막으면, 불청객은 문을 부수고 들어올 것입니다. 하지만 차라리 문을 열어주고, 그저 현관 한구석에 앉아 있다 가라고 자리를 내어주면 어떨까요? 불청객은 의외로 조용히 머물다 제 발로 나갈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수용의 힘입니다.
이제 구체적인 실천 방법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우울이 덮칠 때, 우리는 본능적으로 생각의 미로 속으로 도망칩니다. 과거의 실수를 곱씹거나(반추), 미래의 실패를 미리 걱정합니다. 이 생각의 고리를 끊고 현재의 고요로 돌아오기 위해서는 즉각적이고 감각적인 루틴이 필요합니다.
첫 번째 단계는 멈춤입니다. 우울한 기분이 들면 하던 일을 멈추고, 혹은 쏟아내던 생각을 멈추고 30초만 가만히 있어 봅니다. 이 짧은 시간은 우리가 감정에 휩쓸리지 않고 감정을 바라보는 관찰자의 위치로 이동하는 시간입니다.
두 번째 단계는 명명하기입니다. 심리학 연구에 따르면, 자신의 감정을 구체적인 언어로 정의하는 것만으로도 뇌의 편도체 활성도가 현저히 떨어진다고 합니다. 편도체는 공포와 불안을 관장하는 부위입니다. 우리가 막연하게 기분이 나쁘다고 느낄 때 뇌는 비상사태를 선포하지만, 지금 내가 느끼는 감정은 불안이구나, 혹은 무기력이구나라고 이름을 붙이는 순간 뇌는 그 대상을 처리 가능한 정보로 인식하고 진정하기 시작합니다. 마음속으로 조용히 읊조려 보십시오. 아, 지금 내 안에 우울이라는 파도가 치고 있구나. 이것은 내가 아니라, 내게 찾아온 현상이구나.
세 번째 단계는 닻 내리기입니다. 거친 파도 속에서 배가 떠내려가지 않으려면 닻을 내려야 합니다. 우리에게 가장 확실한 닻은 호흡입니다. 코끝에 닿는 공기의 차가운 느낌, 숨을 들이마실 때 부풀어 오르는 배의 움직임에 주의를 기울이십시오. 생각이 다시 우울로 도망가려 하면, 부드럽게 주의를 돌려 다시 호흡으로 돌아옵니다. 호흡은 언제나 현재 시제입니다. 우리는 어제 숨 쉴 수 없고, 내일 숨 쉴 수도 없습니다. 오직 지금만 숨 쉴 수 있습니다. 호흡에 집중하는 것은 곧 현재에 머무르는 것입니다.
마지막 단계는 공간 내어주기입니다. 호흡을 통해 안정을 찾았다면, 이제 우울이라는 감정을 내쫓으려 하지 말고 당신의 마음 한구석에 자리를 마련해 주십시오. 마치 카페에 온 손님처럼, 그 감정이 앉을 테이블 하나를 내어준다고 상상하십시오. 너는 거기에 있어도 좋아. 나를 해치지만 않는다면. 이렇게 허용하는 순간, 우울은 당신을 집어삼키는 거대한 괴물이 아니라 당신이라는 넓은 공간 안에 존재하는 작은 부분으로 축소됩니다.
우리가 이 고요의 기술을 익힌다고 해서 우울이 영원히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바다가 있는 한 파도는 언제든 다시 칠 것입니다. 그러나 달라지는 것은 있습니다. 바로 당신입니다.
과거의 당신은 파도가 칠 때마다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렸을지 모릅니다. 파도를 막으려다 물을 먹고 허우적거렸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 당신은 파도를 다루는 법을 알게 되었습니다. 파도가 밀려오면 당신은 단단한 해변이 되어 그 물결을 받아냅니다. 억지로 밀어내지 않고, 흠뻑 젖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물이 빠져나갈 때까지 그저 고요하게 지켜봅니다.
우울과 화해한다는 것은 결국 나라는 그릇을 키우는 일입니다. 종지 그릇에 잉크 한 방울이 떨어지면 물 전체가 검게 변하지만, 넓은 호수에 잉크 한 방울이 떨어지면 물은 여전히 맑습니다. 우울을 수용하고 관찰하는 훈련을 통해, 우리는 종지 그릇에서 호수로, 호수에서 바다로 확장됩니다. 그러면 우울은 여전히 존재할지라도, 더 이상 내 삶 전체를 뒤흔들지 못합니다. 그것은 그저 내 안에 떠다니는 수많은 부유물 중 하나가 될 뿐입니다.
애쓰지 마십시오. 당신은 고장 난 기계가 아닙니다. 지금 겪고 있는 그 어두운 감정은 당신이 삶을 진지하게 대하고 있다는 증거이자, 잠시 쉬어가라는 영혼의 신호입니다. 흙탕물이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려 주십시오. 파도가 지나간 자리에는 반드시 고요가 찾아옵니다. 그리고 그 고요 속에서, 당신은 이전보다 조금 더 깊고 넓어진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우울이라는 파도 속에서 배울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기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