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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찌그러진 채로 버텨낸 당신에게

낡은 냄비가 알려주는 상처와 회복의 심리학

by 하레온

1. 낡은 부엌의 풍경


새벽 두 시, 목이 말라 잠에서 깼습니다. 거실의 불은 모두 꺼져 있고, 웅웅거리는 냉장고 소리만이 집 안의 정적을 채우고 있네요. 부엌으로 향합니다. 식탁 위 작은 펜던트 조명 하나만 켜둔 채 물을 마시려는데, 건조대에 엎어놓은 양은 냄비 하나가 툭 하고 시선에 걸립니다.


똑, 똑.


수도꼭지에서 덜 잠긴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오늘따라 유난히 크게 들려옵니다. 그 규칙적인 리듬 사이로 보이는 냄비의 몰골이 꽤 처참하더군요. 바닥은 센 불에 그을려 거뭇거뭇하고, 손잡이 이음새는 헐거워져 살짝 내려앉았습니다. 무엇보다 몸체 한가운데가 흉하게 찌그러져 있습니다. 아마 지난번 라면을 끓이다 급하게 설거지통에 던져 넣었을 때 생긴 상처겠지요.


참 이상한 일입니다. 평소 같으면 아무렇지 않게 지나쳤을 그 찌그러짐이, 오늘밤엔 유독 제 마음을 잡아끄네요. 매끄러운 곡선은 온데간데없고, 울퉁불퉁하게 패인 자국들이 조명을 받아 기이한 그림자를 만들고 있습니다. 문득 그 모습이 낯설지가 않아요. 거울 속에서 마주하던 제 얼굴 같기도 하고, 승진에서 누락되던 날 회식 자리 구석에 앉아 있던 저의 처진 어깨 같기도 합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매끄러운 것을 사랑하죠. 흠집 하나 없는 스마트폰 액정, 티끌 하나 없는 새하얀 운동화, 그리고 실패의 이력이 없는 깨끗한 이력서 같은 것들이요. 그런 '새것'들은 우리에게 묘한 안정감을 주니까요. 반면 찌그러진 것은 어떤가요. 불안합니다. 그것은 관리 소홀의 증거이자, 교체되어야 할 대상이며, 언젠가는 폐기되어야 할 예비 쓰레기처럼 취급받곤 합니다.


하지만 부엌 한구석, 저 찌그러진 냄비를 한번 보세요. 저것은 버려졌나요? 아닙니다. 여전히 내일 아침이면 국을 끓여낼 것이고, 가장 뜨거운 불 위를 견뎌낼 겁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왜 내 삶의 찌그러짐 앞에서는 그토록 가혹하게 구는 걸까요. 왜 나 자신의 흠집은 견디지 못하고 감추려 드는 걸까요. 식탁의 긁힌 자국을 손끝으로 가만히 더듬으며 생각해 봅니다. 흠집은 정말로 가치를 떨어뜨리는 낙인일까요, 아니면 우리가 미처 읽어내지 못한 삶의 다른 언어일까요.




2. 상처의 심리학과 오해

Image_fx - 2025-12-04T212355.134.png 조각난 도자기 화병


심리학에는 '자기개념(Self-Concept)'이라는 용어가 있습니다. 쉽게 말해 '나는 이러이러한 사람이다'라고 스스로 정의 내리는 틀을 말해요. 문제는 우리가 이 자기개념을 형성할 때, 사람을 마치 '물건'처럼 평가하는 오류를 범한다는 점입니다. 공장에서 갓 나온 물건은 시간이 지날수록 감가상각이 일어나죠. 기능은 떨어지고, 디자인은 유행에 뒤처지며, 표면은 낡아갑니다. 이 관점을 인생에 그대로 대입하면 중년의 삶은 필연적으로 '가치 하락'의 과정이 되고 맙니다.


젊음이라는 광택은 사라졌고, 열정이라는 엔진은 예전 같지 않으며, 마음 곳곳에는 거절과 실패라는 기스가 났으니까요. 그래서 우리는 흠집을 부끄러워합니다. 그것을 '결함'으로 인식하기 때문이죠. 내가 약해서, 내가 실수를 해서, 혹은 내가 모자라서 생긴 오점이라고 여기는 겁니다.


가상의 인물, 김철수 씨의 이야기를 한번 해볼까요. 그는 48세의 평범한 직장인입니다. 얼마 전 중요한 프로젝트에서 배제된 그는 후배들이 치고 올라오는 소리에 밤잠을 설치곤 합니다. 회의 시간에는 점차 발언권이 줄어들고, 그는 자신의 이력서가 찌그러졌다고 느낍니다. 한때는 빛나는 스테인리스 냄비처럼 반짝였는데, 이제는 여기저기 부딪혀 볼품없는 양은 냄비가 되었다고 자조하면서요. 철수 씨는 상처를 숨기기에 급급합니다. 쿨한 척, 아무렇지 않은 척, 여전히 건재한 척 연기하지만, 그 연기가 길어질수록 속은 더 까맣게 타들어 갈 뿐입니다.


이 글은 김철수 씨뿐 아니라, 크고 작은 삶의 흠집을 가슴에 지닌 모든 사람에게 닿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큰 착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상처가 없어야 훌륭한 삶이라고, 찌그러지지 않아야 사랑받을 수 있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심리학은 상처를 수학적으로 설명할지 몰라도, 우리는 상처를 감정으로 느끼잖아요. 이제 이 둘의 간격을 좁혀야 할 때입니다. 흠집을 결함으로 보던 시선이, 어느 순간 '이 모양 말고는 설명할 수 없는 나의 역사'로 보이기 시작할 때가 반드시 오거든요.




3. 기능의 재발견, 끓여내는 힘


다시 부엌의 냄비로 시선을 돌려봅니다. 냄비의 본질은 과연 무엇일까요? 매끈한 표면일까요, 아니면 완벽한 원형의 형태일까요? 아닐 겁니다. 냄비의 존재 이유는 단 하나, 물을 담고 불을 견뎌 무언가를 끓여내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저 냄비가 찌그러진 이유는 명확합니다. 찬장 속에 고이 모셔두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매일같이 가스불 위에 올라가 뜨거움을 견뎠고, 끓어 넘치는 국물을 받아냈으며, 때로는 설거지통에 거칠게 부딪혔기 때문입니다. 즉, 찌그러짐은 파손이 아니라, 시간을 견딘 사람에게만 새겨지는 문양입니다. 흠집은 당신이 약해서 생긴 것이 아니라, 끝까지 버텼기 때문에 생긴 것이니까요.


심리학에서는 이를 '외상 후 성장(PTG, Post-Traumatic Growth)'이라고 부릅니다. 뼈가 부러진 자리가 붙으면 더 단단해지듯, 사람은 시련을 통과하며 이전보다 더 깊은 이해와 강인함을 얻게 된다는 이론이죠. 우리는 이것을 다른 말로 '연륜'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연륜은 매끄러운 피부가 아니라, 거친 손마디와 주름진 눈가에 깃드는 법이니까요.


실패한 사업 아이템은 당신에게 시장을 보는 냉철함을 주었을 겁니다. 믿었던 사람에게 당한 배신은, 진짜 내 사람을 구별하는 혜안을 주었을 테고요. 부모님을 떠나보낸 슬픔은, 남은 가족을 더 깊이 사랑하게 만드는 단단한 접착제가 되었을 겁니다. 이 모든 것은 당신이 찌그러지면서 얻어낸 고유한 기능들입니다.


사물 중심의 시선으로 당신의 마음을 한번 들여다보세요. 마음 표면에는 숱한 스크래치가 나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기능을 점검해 보세요. 당신은 여전히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나요? 여전히 내일을 위해 고민할 수 있나요? 그렇다면 당신은 망가진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더 노련하게 삶을 요리할 준비가 된 것입니다. 새 냄비는 물을 끓일 수 있어도, 낡은 냄비만이 낼 수 있는 깊은 맛이 있는 법이니까요.




4. 틈 사이로 들어오는 빛

Image_fx - 2025-12-04T212432.667.png 어두운 벽의 갈라진 틈새 사이로 눈부신 황금빛 햇살이 강렬하게 쏟아져 들어오는 희망적인 클로즈업 사진.


캐나다의 싱어송라이터 레너드 코헨은 그의 노래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모든 것에는 틈이 있다. 빛은 바로 그 틈을 통해 들어온다."


(There is a crack in everything, that's how the light gets in.)


완벽하게 밀폐된 공간에는 빛이 들어갈 수 없습니다. 어딘가 깨지고, 금이 가고, 벌어져야 그 사이로 외부의 빛이 스며들죠. 우리 삶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우리가 그토록 감추고 싶어 했던 실패의 기억, 이별의 아픔, 열등감이라는 틈새가 사실은 내면의 성장이 들어오는 유일한 통로였을지도 모릅니다.


그 틈이 있었기에 우리는 타인의 고통에 공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내가 아파보지 않은 사람은 남의 비명 소리를 듣지 못합니다. 당신이 겪은 그 찌그러짐 덕분에, 당신은 누군가의 아픔을 안아줄 수 있는 품을 갖게 된 셈입니다.


이제 글을 마치며 부탁 하나를 드리고 싶습니다. 오늘 밤, 물을 마시러 부엌에 가시거든 그 찌그러진 냄비를 한 번만 더 들여다봐 주세요. 그리고 손끝으로 그 울퉁불퉁한 표면을 천천히 쓸어보세요. 차가운 금속의 감촉 끝에서 뜨거운 불을 견딘 시간이 느껴질 겁니다.


그 냄비에게, 그리고 거울 속 당신에게 이렇게 말해주세요.


"너 참 열심히 살았구나. 찌그러진 게 아니라, 치열했던 거구나."


당신은 충분히 괜찮은 사람입니다. 찌그러진 냄비에도 빛은 스며들고, 당신의 상처 틈 사이로도 이미 눈부신 성장이 들어와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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