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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nJin May 21. 2018

[메트로폴리탄_7] 엘리자베스 패런 by 토머스 로렌스

토마스 로렌스는 죠수아 레이놀즈, 토마스 게인즈버러를 잇는 당대 최고의 영국 초상화가였다. 그리고 이 작품, <엘리자베스 패런> 그가 평생에 걸쳐 그린 초상화 중에서도 최고의 작품이며, 모델에게도 극적인 삶을 열어주는 계기가 된 작품이다.     

[ 엘리자베스 패런 ]              

토마스 로렌스는 영국 브리스톨에서 여관업을 하는 부모 밑에서 태어났다. 여관업은 그다지 형편이 좋지 못해서 그의 아버지는 어려서부터 그를 돈벌이에 이용했다. 그런데 여관 손님들 앞에서 시를 낭송하거나 초상화를 그리던 이 꼬마가 그림에서 천재적인 두각을 나타냈다.  1779년, 여관업이 파산하면서 '바스'로 이사한 후에는 본격적인 파스텔 초상화가로 나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질 정도였는데, 그때 그의 나이가 고작 열 살이었다. 재능 있고 매력적인 이 어린 소년은 곧바로 바스의 유명 인사들 사이에서 사랑을 받았다. 주변의 부유한 사람들이 소유한 명작을 모사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고, 그렇게 독학으로 계속 성장해 나갔다. 


18살에는 런던으로 건너갔고 곧 초상화가로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21살부터는 이미 왕실 초상화를 주문 받았다. 영국 미술의 자랑인 조슈아 레이놀즈가 사망하자 불과 23세의 나이로 궁정화가로 임명되었고, 25살에는 왕실 아카데미의 정회원이 되었다. 1815년에는 기사 작위를 수여 받고 당시 섭정이던 조지 4세의 후원으로 워털루 연합의 유럽 군주들과 외교관들의 초상화를 그리기도 했다. 이때 그린 유럽 각국 수반의 초상화는 지금도 런던 윈저성 워털루 채임버(Waterloo chamber)의 벽을 장식하고 있다. 1820년에는 영국 왕실 아카데미의 회장에 올라 1830년 60세로 세상을 뜰 때까지 명실상부한 당대 최고 초상화가로 이름을 날렸다. 이 모든 경력이 그가 21세에 그린 바로 이 작품에서 시작되었다. 

이 작품의 모델, 엘리자베스 패런(1759~1829)은 아일랜드계 배우이다. 키가 크고 마른 편이었으며 풍부한 표정에 활기차고 생기가 넘치는 매력적인 인물이었던 그녀는 배역도 대체로 유쾌한 코미디에서 미모의 고상한 아가씨 역할을 주로 맡았다. 이 그림이 왕립 아카데미에 전시되었을 당시에는 이미 당대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당시 전시 제목은 지금과 달리 그저 ‘여배우의 초상’이었다. 엘리자베스 패런은 “유명” 여배우이 초상도 아닌 그냥 여배우의 초상이라는 제목에 자존심이 상했다고 한다. 하지만 언론들은 ‘활기차면서도 우아하며 매력적인 성격이 그대로 드러난 완벽한 엘리자베스 패런’이라고 찬사했다. 모델을 몰라볼 리 없었을 뿐만 아니라 그녀의 매력도 고스란히 재현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사실 그녀를 전혀 모르는 우리가 봐도 한눈에 그림 속 모델이 활기차고 유쾌한 성격의 소유자라는 사실이 보인다. 외모뿐만 아니라 성격까지 고스란히 드러나는 초상화는 그래서 재밌다. 초상화를 통해 그 사람의 성격을 먼저 예상해 보고 모델에 대해 알아보면 그 작품이 왜 박물관에 걸려 있는지 수긍이 간다. 

로렌스는 연극 무대의 한 장면을 포착하여 이 작품을 구성했다. 그 결과 마치 객석에서 올려다 본 모습처럼 아래에서 위로 올려다 보는 시점의 전신 초상이 되었다. 일반적인 실내가 아닌 폭풍이 몰아칠 듯 어두운 배경도 극적이다.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하늘 아래의 엘리자베스 패런은 막 돌아서 달아나는 것 같으면서도 장난기 가득한 눈빛과 미소로 마치 따라 오라고 말하는 듯하다.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그녀를 따라 가야만 할 것 같다. 반짝이는 망토와 가죽장갑, 모피, 부슬거리는 머리카락 하나 하나도 모두 눈으로 만져질 듯이 부드럽다. 

한가지 재미있는 이야기는 그림의 인기에도 불구하고 엘리자베스 패런은 줄기차게 로렌스에게 그림을 수정해달라고 졸랐다는 사실이다. 그림을 관람한 팬들이 엘리자베스 패런이 쥐면 꺾일 듯, 불면 날아갈 듯 너무 말라 보인다고 걱정을 늘어놓았기 때문이다. 패런은 로렌스에게 자신을 좀 더 통통하게 만들어 달라고 편지했다. 요즘을 사는 우리의 시각으로는 배부른 투정인 셈이다. 하지만 로렌스는 그림 속의 그녀가 실제 있는 그대로의 그녀의 모습이라고 생각했고 그림에 더 손대지 않았다.  

그림 완성 후 7년 뒤인 1979년, 엘리자베스 패런은 더비 백작과 결혼해서 백작부인이 되었다. 고전판 그레이스 켈리쯤 된다 할 수 있겠다. 토마스 로렌스는 이 작품으로 앞 세대 최고의 초상화가인 조슈아 레이놀즈의 계승자로 인정받게 되었고 초상화가로서의 탄탄대로가 열렸다. 평생동안 단 2점의 역사화를 제외하고는 초상화 한 길만 걸었던 토마스 로렌스는 일생 동안 우아하고 아름다운 인물묘사로 최고의 초상화가로서의 인기를 누렸다. 

다만 한 가지, 로렌스 경은 이 작품 이후 그렇게 명성과 수입이 쌓여가는 와중에도 항상 빚에 시달렸다. 그는 정렬적으로 열심히 일했으며 사치한 적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빚에 허덕이다가 후원자 덕에 겨우 위기를 모면해 나가곤 했다. 종국에는 무일푼으로 생을 마감했다. 대체로는 그의 가족에게 과하게 많은 경제적 지원을 했던 점이 그 원인이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하지만 무엇보다 대가의 그림을 사 모으는 데에 지출이 많았다. 독학으로 성장하다 보니 보고 배울 고전 작품들이 많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비록 엘리트 미술 교육 코스를 밟지는 않았지만 토마스 로렌스는 분명 최고의 화가들을 스승으로 두었고, 그 자신이 최고의 화가의 반열에 올라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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