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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리 Jun 07. 2024

026. 시쁜 하루

시쁘다

시쁘다

1. 마음에 차지 아니하여 시들하다.

2. 껄렁하여 대수롭지 않다.


연휴 사이에 낀 하루를 휴가로 썼다. 오랜만에 늦잠을 자고 일어나 내내 엉망진창인 방을 둘러본다. 세척한 만년필이 바닥에 굴러다니고 빨래는 또 쌓여있고 책들은 여기저기 뒹굴고 있다. 집에 있는 시간을 좋아하는데 집안은 엉망이다. 정리해야지 하다가도 금세 귀찮아져서 그대로 방치해 둔 지 오래다.


느지막이 일어나서 동생을 소환해 같이 점심을 먹었다. 휴가라고 해서 특별한 일정은 없다. 이미 이틀을 밖에서 놀다 왔으니 오늘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쉬기로 마음먹었다. 점심을 먹고 커피를 마시고 도서관으로 갔다. 얼마 전 새로 지어 이전한 새 도서관이 아주 마음에 든다. 깨끗한 공간에서 책을 읽고 필사할 노트를 꾸미고 필사를 했다. 오늘은 날이 흐려서 쨍한 초록은 아니지만 짙은 초록의 풍경을 바라본다. 새 도서관에는 아이들도 어른들도 많았다. 고요하진 않지만 차분한 도서관에 트로트가 울려 퍼진다. 조용히 전화를 받지도 않고 스피커폰을 통화하는 아주머니가 거슬린다. 사서선생님에게 얘기할까 하다가 그냥 이어폰을 꺼내든다. 좋아하는 노래를 받아 적었다. 오랜만에 가사를 필사했다.


나의 마음이 그대를 따라가네요 나의 마음이 그대만 바라보네요 

먼 길 돌아 지나쳐간 바람이 혹시 마중 나온 그대였을까 망설이다가 멈춰요


바람이 불어와 마음을 시리게 한다. 어제는 기쁘게 지인을 만나고 맛있는 것도 먹고 좋았는데 오늘은 금세 가라앉는 마음이 참 시쁘다. 적당한 가라앉음 상태가 나의 디폴트다. 내가 I라고 하면 주변 사람들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네가?'라는 눈빛으로 나를 본다. 나는 사람들이 힘들다. 함께해서 편한 사람도 있지만 사람을 만나고 신경 쓰고 눈치 보는 일들이 피로하다. 인스타그램 피드에 달린 댓글에 방긋방긋 웃는 댓글을 달고 함께 쓰는 사람들의 글에 댓글을 달고 조금 지쳤다. 마음을 담아 댓글을 다는 건 그저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와는 다른 애씀이 필요한 일이다. 그렇게 마음을 전하면서 덩달아 마음이 먹먹해지기도 하고 애정을 풀어내기도 한다. 그럴 수 있는 대상은 많지 않아서 좀 더 성의껏 마음을 전하고 싶어 진다. 서로가 서로에게 마음을 담아 보내주었으면 하는 마음도 크다. 기대하는 마음도 있다. 하지만 기대하면 실망하기 마련이라 좀 더 담백해지고 싶은데 자꾸만 기대가 끼어들어서 마음을 꾹꾹 누르기도 한다. 나는 쓸데없이 열정적일 때가 있으니까, 그래서 혼자 제풀에 꺾여버리기도 하니까 조절이 필요하다.


시쁜 하루가 지나간다. 단어채집을 시작하고 나서 어떤 단어에 대한 주제가 명확한 글을 쓰고 싶었다. 요즘 내가 쓰는 글은 시답잖은 글이고 시시한 글뿐이다. 하지만 언제 시시하지 않은 글을 쓴 적이 있던가. 시시해도 글을 쓴다. 시시한 글도 글이다. 시쁜 하루도 괜찮은 하루다.


내일은 비예보가 있다.

그러면 나는 조금 행복해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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