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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리 Jun 09. 2024

027. 비가 오는 바다를 좋아해?

곤두박질치다

곤두박질치다

1. 몸이 뒤집혀 갑자기 세게 거꾸로 내리박히다.

2. (비유적으로) 좋지 못한 상태로 매우 급격히 떨어지다.


연휴 시작부터 주말 비소식에 설렜다. 화요일에는 60% 정도였는데 목요일에 확인하니 토, 일 전부 비로 바뀌었다. 토요일에는 바다를 보러 가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소중한 월차였던 어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그냥 쉬는 날을 보냈다.


아침에 일어났는데 컨디션이 썩 좋지 않다. 이럴 땐 여자라는 사실이 참 불편하다. 그러나 이 정도로 집에 있을 순 없지. 무거운 몸을 일으켜 준비해서 나왔다. 아침에는 비가 내리지 않았는데 남쪽에는 비가 많이 온다고 했으니까 기대하는 마음으로 출발했다. 비를 좋아하고 바다도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하면 더 좋겠지만 갑작스레 함께할 사람은 없을 테니 혼자만의 여행을 떠난다.


요즘 내가 좋아하는 바다는 남해다. 남해바다 말고 남해군의 바다. 바다는 어디든 다 좋지만 작년부터 꾸준히 가고 있는 바다는 남해에 있는 바다다. 해가 뜨는 새벽 바다, 윤슬이 반짝이는 오후의 바다, 해가 지는 노을풍경이 황홀한 저녁 바다, 파도소리가 더 잘 들리는 까만 밤바다, 비가 내리는 흐린 바다, 눈이 내리는 추운 겨울 바다. 바다는 언제나 아름답고 마음을 평온하게 한다. 가장 그리운 건 울진의 이름 모를 그 바다.


오늘은 비가 내리는 잿빛 흐린 바다를 보러 간다. 남해에 도착하니 비가 폭우처럼 쏟아진다. 엄청난 장대비가 바람을 타고 세차게도 내린다. 우산을 때리는 빗소리가 좋다. 좋아하는 김밥을 사고 좋아하는 <아마도 책방>에 들려 책도 샀다. 이제 가보고 싶었던 소품샵이자 카페인 <시간의 흐름>으로 가야지.


오늘의 할 일은 카페 <시간의 흐름>과 구미동해변에 가는 것이다.


시간의 흐름은 이동면에 있는 작은 카페다. 카페 안에는 소품샵과 작은 책방이 함께 있다. 아기자기한 뜨개소품과 독립출판물, 초록의 식물들과 원목테이블과 원목 의자까지. 내가 좋아하는 분위기의 공간이었다. 카페의 시그니처음료인 여름커피를 주문했다. 아메리카노에 레몬청을 넣은 독특한 커피인데 상큼하니 맛있었다. 이곳에서도 책을 한 권 샀다. 책을 사면 드립백을 하나 서비스로 주신다. 창밖으로 낮은 건물들과 가로수, 화분들이 보인다. 비가 내리는 창밖을 바라보며 커피를 마신다. 가져온 책이 있었지만 방금 산 책을 읽는다. 김마음 작가의 <우리의 시간이 꽃말이 되었을 때>라는 책이다. 책을 펼치자마자 윤슬이 반짝이는 바다사진이다. 다음은 '우리를 처음 우리라 부르던 지점, 그 이전부터 우리가 끝내 우리를 저버린 지점, 그 이후의 여정까지.'라는 문장이 바다 사진에 박혀있다. 마음이 콕콕 쑤신다. 천천히 그 여정을 함께한다. 읽다가 다시 창밖을 본다. 비가 내린다. 다시 책을 읽는다. 머릿속엔 상념이 자꾸만 피어나고 나는 별수 없이 당신을 생각한다. 우리가 우리여서 좋았던 시절과 우리가 여전히 우리임에도 그 이전의 우리가 될 수 없음의 서글픔이 뒤섞여 창밖에 내리는 비가 내 안으로 몰려온다. 벅차오르던 마음과 곤두박질치는 마음을 밀어내기 위해 가만히 숨을 고른다. 아무것도 바라지 말자. 그 어떤 마음도 품지 말자. 다시 창밖을 본다. 이럴 때 정말 마음이 너무 아린다. 우리는 좋아하는 게 비슷해서 더 빨리 가까워졌고 더 애틋했다. 이제는 좋아하는 걸 보면 당신을 가장 먼저 생각한다. 자꾸만 퍼져나가는 애달픔과 애틋함, 그리움과 서글픔, 그 마음을 건져 다시 집어넣느라 바쁘다.


비가 좀 잦아들었다. 마음도 다시 가라앉았다. 이제 바다를 보러 가야지. 짙은 녹음의 숲을 지나 잿빛 바다, 우중충한 하늘, 세차게 쏟아지는 비. 가는 길에 앵강다숲이 가까워 잠시 들려본다. 비가 잠시 그쳤다. 토독토독 나뭇잎에 맺힌 빗방울들이 떨어진다. 나무 사이로 바다가 보인다. 햇살이 눈부신 오후에는 윤슬로 반짝이는 바다와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이 아름다운 풍경이었을 텐데 비가 내리는 오늘은 온통 잿빛이다. 바닷물마저 빠져 어촌의 작업장과 돌무더기가 더 눈에 들어온다. 저 멀리 바다가 까마득하게 멀다. 바다를 곁에 두고 초록의 숲을 걸었다. 비가 내리기 시작해서 다시 출발한다. 구미동해변에 주차를 하고 차 안에서 바다를 바라본다. 비가 이렇게도 많이 오는구나. 빗소리를 들으며 아마도 책방에서 산 책을 읽는다. 구미동해변은 해수욕장도 아니고 무척 작은 해변이라 사람이 많지 않아 좋았던 곳이었다. 몇 번을 혼자 오기도 했는데 역시 혼자는 쓸쓸한 곳이다. 오직 빗소리만 기득찬 작은 차 안에서 바다를 바라본다. 여기는 바닷속에 곤두박질친 나의 마음. 파랗고 빛나는 바다는 내가 가고 싶은 곳. 강릉바다에서 썼다던 시인의 글은 읽히질 않고. 좁은 차 안은 바다에 잠긴 것처럼 숨이 가빠지고. 바깥으로 나가니 징그러운 갯강구들이 몰려오고. 저 멀리 물고기가 뛰어오른다. 파도소리를 들으며 가만히 바다만 본다.


비가 그쳤다.

이제 집으로 돌아가자.

비가 계속 내린다면 이곳에 머무르려고 했는데 비가 그쳤으니 가야지.


배터리가 방전됐다.

내 마음 따라 닝구 너도 곤두박질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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