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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리 Jun 26. 2024

045. 언젠가 구원받을 거야

<상자를 열지 않는 사람>을 읽고


구원 (救援)
어려움이나 위험에 빠진 사람을 구하여 줌.


누구에게나 열고 싶은 않은 마음이 있을 것이다. 상자를 열지 않겠다는 백은선의 시는 어쩌면 보여주고 싶지 않은 마음, 상자 속에 담겨있는 숨겨진 마음에 대한 시가 아닐까 생각했다. 지금 이 순간만은 영원히 기억하고 싶지만 그 마음을 네가 몰랐으면 하는 것처럼.

■ 모든 것을 기록하는 카메라를 머릿속에 심을 수 있다면 이식할 거야?
나는 아-니, 라고 대답하면서도
지금 이 순간만은 영원히 기억하고 싶었다 (p.22 #형상기억합금 )

언젠가 침묵만이 유일한 언어였던 순간이 있었다. 말하고 있지만 말은 말로 전달되지 않고 말하려는 것은 자꾸만 멀어지고 입을 다무는 수밖에 없었던 그 순간을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 대가 없이 사랑해 줄 수는 없을까? 마음은 좆같아서 대가 없이 사랑하기에는 마음은 자꾸만 떠돌고 만다. 듣고 싶고 보고 싶은 그 절박한 마음은 너무나도 투명한데 투명한 그 마음을 들여다보지 못하고 눈을 감고 우리는 빛의 세계에서 탈락했다. 빛의 세계에서만 우리는 존재할 수 있나요? 탈락한 이후의 우리는 없나요?

■ 말을 할수록 말하려는 것에서 멀어져 버려서
입을 다무는 것이라고 p.41 #역할바꾸기

■ 존재하는 데 왜 이렇게 많은 지옥이 필요한가요
천국은 하나뿐이고
들어가는 문은 좁은데

아무 대가 없이 사랑해 줄 수는 없어요? (p.65 상자를 열지 않는 사람)

■ 듣고 싶다는 마음이
보고 싶다는 절박이

이렇게 투명해도 괜찮은 걸까

■ 내가 아는 건 비밀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이 슬퍼 나는 눈을
뜨는 순간 빛의 세계에서 탈락했어(p.70 #비신비 )

빛의 세계에서 탈락하고도 빛은 여전히 존재하고 투명한 마음은 전혀 가려지지 않고 결국 당도한 곳이 빛이라니. 빛이라 믿었으니 빛이 아니었고 가려지지 않는 마음은 투명하지 않았고 빛과 투명은 너무 무거워서 우리를 짓눌러버렸다. 그럼에도 끝까지 나를 사랑하실 건가요?


헛소리하지 마세요.


웃음이 터져 나온다. 그래. 헛소리지. 그런 게 어디 있겠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가 없이 투명하게 사랑할 수 있겠어?

■ 빛이 있다고 쓴 다음 지웠다
계속되는 투명을 견디는 일은
조금씩 죽는 거라서
당도한 곳은 마침내 빛이라는 걸
다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p.127 #진실은구체적이다 )

■ 어떤 페이지는 너무 무거워서 넘길 수가 없고 (P.128 #명일 (命日))

■ 그럼에도 끝까지 나를 사랑하실 건가요?

헛소리하지 마세요

내가 받은 대답입니다. 내가 상상한 대답입니다.(p.135 #앙망 )

언제가 구원받을 거라고 믿으며 희망과 손잡고 걸어간다 한들 괜찮아지는 건 아무것도 없다. 살고 싶지 않다고 말하고 오늘 아침이 지옥 같다고 했으면서 아침이 오는 게 기적 같니? 낭만도 구원도 다 무슨 소용이람. 희망이 손을 꼭 쥐어도 내가 그 손을 놓아버리는 그만이잖아.

■ 지옥은 여기 있다. 이미 하나라서 하나가 될 필요가 없다.
언젠가 구원받을 거야.(p.138 앙망 )

■ 희망과 함께 손을 잡고 걷는다
나 있잖아, 더 이상 살고 싶지가 않아

희망을 손을 꼭 쥔다

말하지 마
말하지 마
괜찮아지는 건 아무것도 없다 (p.140 앙망)

■ 지나갈 거야 오늘밤도
매일 아침에 해가 뜬다는 거
어쩐지 기적 같지 않니

어젯밤엔
어김없이 아침이 찾아오는 게 지옥 같다고
적어놓고
오늘은 네게 그런 말을 했다 (p.150 #향기 )

어제는 선한 마음, 맑고 투명한 사랑, 사랑을 아름답게 바라는 글을 써놓고
오늘은 낭만도 구원도 없으니 희망 따윈 손 놓아버리는 글을 쓴다.


시는 무엇일까. 시을 읽는다는 것은 어떤 마음일까.
시를 읽는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다.
당신을 생각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다.
시를 읽고 또 읽는다고 해서 시를 쓸 수도 없다.
당신을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고 해서 당신을 가질 수 없다.


시밖에 생각나지 않아서
당신밖에 생각나지 않아서


지긋지긋하다고 하는 건 그만큼 그리워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넘쳐흘러서이지 않을까,
라고 냄새로 공기로 빛으로 느껴지는 마음을 주워 담는다.


당신이 없고 나서야 당신이 있다는 걸을 알았으니까요.
사랑을 잃고 나서야 사랑이 있다는 것을 알았으니까요.

■ 시에 대해서 오래 생각했다
시에서 시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너무 지긋지긋한데도

시밖에 생각이 나지 않아서 (p.155 #커디란배나무의집 )

■ 사람은 언어로 생각한다는 말은 틀렸어요.
나는 냄새로 공기로 빛으로 생각을 했거든요.

결핍은 존재를 알아야 발생하는 거예요.
있는지도 모르는 것을 그리워할 수는 없으니까요. p.164 #가장아름다운혼 )

시인이 말했다. 시는 믿을 수 없이 아름답고 아픈 장르라고. 시는 읽으면 읽을수록 모르겠고 아름답고 아프다. 시인의 문장에 자주 걸려 넘어졌으며 어떤 문장을 두고두고 생각했다. 나를 어딘가로 데려다 줄지는 모르겠지만 그곳이 지옥일지라도 언젠가 구원받을 거야.

■ 시는 믿을 수 없이 아름답고 아픈 장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진짜로 시를 알게 되면 결코 시를 떠날 수 없게 된다고 믿어요. 제 시집을 읽는 분들이 여러 번 걸려 넘어 지기를, 때로 한 문장에 주저앉아 떠날 수 없게 되기를 바라면 너무 큰 희망이겠죠. 이제 막 세상에 나오려는 시집이니 감히 그런 마음을 품어봅니다. 시를 쓰인 그대로 읽어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그러면 어느 순간 퍼즐처럼 완성되는 장면이 있을 거라고, 그게 우리를 어딘가로 데려다 줄 거라고요.
_ 시인의 인터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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