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굴데굴, 당신에게 굴러갈 미래
당신의 인생이나 미래에 대해 무엇이든 말해 주는 수정구슬이 있다면,
무엇을 물어보고 싶은가요?
아빠는 잠시 고민하더니 대답했다.
"어…… 앞으로 내가 노후에 먹고사는 걱정 없이 내 마음대로, 그니께네 내가 회사를 그만두고 정년퇴직을 딱 하고 일을 못할 때 어떻게 살 건지 궁금하지. 편하게 살 건지, 풍족하게 살 건지, 건강할 건지 이런 거. 내가 노동 능력이 없는 그날 이후부터 어떻게 살지 궁금하지."
"그게 왜 궁금한데"
"궁금하지. 니는 안 궁금하나"
(동시에) "어"/ "안 궁금하다 그러겠지 뭐"
"미래가 궁금하지. 남은 인생이. 잘 사는지 못 사는지"
"수정구슬이 거지같이 삽니다. 잘 삽니다 하면 뭐가 달라지나"
"아니 그건 아니어도 그냥 궁금하지. 아니다. 그냥 안 물어볼래. 모르면 희망이라도 갖고 살지. 안 물어볼래"
"그럼 딴 거 물어봐, 질문"
"물어볼 건 없는데. 내 미래를 물어보는 거 그거는 굉장히 위험한 건데 그거는. 알고 나면 진짜 뭔 희망이 없어. 그냥 안 물어볼래. 미래"
뜻밖의 기회 같은 게 생긴다면 누구나 희망에 차 고민할 것이다. 수정구슬로부터 어떤 대단한 정보를 얻어내서 일신의 변화를 꾀할 것인지. 그날 밤 아빠와 나도 그랬다. 지니의 요술 램프를 얻은 알라딘처럼 들떠서 우왕좌왕, 이 희망을 어떻게 쓸 것인지 고민했다. 그냥 안 물어보겠다던 아빠도 다시 한 번 램프를 문질렀다.
"나는 그거 물어보고 싶은데. 내 운명의 짝의 얼굴을 보여 줘"
"어, 그럼 난 그거. 죽을 때까지 혼자 살 건지, 죽을 때까지 옆에서 지켜줄 사람이 있는지. 나 혼자 계속 살아야 하는지. 그거"
"만약에 수정구슬이 '없다' 이러면은?"
"그러니께 또 안 물어보고 싶다. 안 물어볼래"
"물어봐"
"니가 자꾸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다 하니께 그냥 안 물어볼래"
"나는 아빠가 최선의 질문을 할 수 있게 도와주는 거지"
"미래를 아는 건 안 좋은 거야. 희망이 없어지니까. 그냥 희망을 가지고 사는 게 제일 좋아"
"근데 내 질문은 답을 들어도 희망이 없어지는 게 아니잖아. 내 운명의 짝의 얼굴을 알면 허튼 데 힘 안 빼도 되고. 그냥 그 사람만 찾으면 되는 거잖아"
"나도 그럼 그거야. 어쩔 수 없어"
"(웃음) 베끼는 거라? 뭐 커닝을 하고 있어"
"(웃음) 아니 커닝이 아니라 나도 그거라서 그래. 그럼 고 사람만 찾으면 되잖아. 맞네(웃음)"
"아니 뭐 따라쟁이네(웃음)"
"(웃음) 따라쟁이는 뭐 따라쟁이야(웃음). 니는 억수로 좋은 거 찾았다. 내가 그거 할게. 니는 다른 거 찾아. 어차피 사람 마음은 다 똑같애"
"아니 내가 먼저 찾았는데 내가 왜 바꿔줘야 되냐고!"
"(웃음) 나는 더 좋은 거 못 찾아. 니는 찾을 수 있잖아"
"아니 어이가 없네. 아빠가 자식 질문을 뺏어가네"
사실 둘이 같은 질문을 해도 무관하지만, 아빠가 오해하며 흘러가는 대화도 그 나름대로 즐거워서, 나도 그 흐름을 타기로 했다.
"뺏어가는 게 아니고 니가 한 개 선물했다고 그래. 어쩌겠어. 나는 이거 해도 안 되고 저거 해도 안 되는데. 니 가만히 생각해 봐. 더 좋은 거 있는지"
"나는 그거 말고 궁금한 거 없어"
"그럼 니가 뭐 예를 들어서 몇 개 해 오든지. 생각이 안 나 그러면"
"아니 뭐 나한테 질문 맡겨 놨어?"
"맡겨놓은 게 아니고. 사람이 생각 못할 수도 있지. 그걸 어떻게 다 생각하노"
"아니, 아빠가 생각을 해 봐(아빠의 다른 생각이 궁금해서다)"
"없어, 그거 말고는"
"알았어. 그럼 그 질문 아빠 해. 아빠 줄게"
"응 그래 고마워. 그럼 니는 다른 거 찾아봐"
"나도 그거 할 건데?"
"(갸우뚱) 응? 그래?"
"응"
"그래, 그럼"
통화 시간이 늘어날수록, 사실 존재하지도 않는 수정구슬에 무슨 질문을 던질지는 더 이상 화두가 아니었다. 아빠가 많이 웃어서, 웃고 또 웃어서 기분이 좋았다. 나의 장난과 농담이 데굴데굴 아빠에게 굴러가서, 아빠가 데굴데굴 웃고 있는 게 좋았다. 조금은 괴롭다는 듯 인상을 쓰면서도, 얼굴 가득 주름이 지도록 웃고 있을 아빠를 생각하니 행복했다. 수정구슬은 이걸로 할 일을 다 했다는 생각마저 들었으니까.
수정구슬에게 물어보려 했던 것.
"내 운명의 짝의 얼굴을 보여 줘!"
취소한다.
반질반질한 수정구슬에 내 얼굴을 비추어 가만히 들여다볼 것이다. 내 운명이 걸어온 길을 살피고, 현재의 모습에 집중해야지. 운명의 상대를 기다리는 것보다는 훨씬 더 즐거운 인생을 기대해야지. 그럼 묻지 않아도 듣게 될지 모른다. 딱딱한 구슬이 일러주는 말랑한 답을. 나의 투명한 욕망, 둥근 꿈, 반질반질한 미래, 깨지지 않는 진실.
그냥 희망을 가지고 사는 게 제일 좋아.
공평하게 나도 아빠의 답을 하나 커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