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당신은

우리는 모두 이별하게 될 테지만

by 정란

부모님은 2013년에 이혼했다. 내가 대학을 졸업한 해였다. 부모님이 이혼한 해가 언제인지도 실은 이 인터뷰를 하면서 알았다. 벌써 10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고, 부모님의 이혼 시기를 곱씹으며 살진 않으니 기억에서 흐려진 것이다. 2014년에 코이카 해외봉사단원으로 스리랑카에 파견됐다. 출국일에 가족이 모두 함께 모였고, 내가 돌아온 날 다시 모였다. 내가 떠날 때에는 모두가 눈시울을 붉혔고, 돌아오는 날에는 두 팔 벌려 나를 환영했다. 저녁을 함께 먹고, 꽃으로 실내 장식이 된 카페에서 차를 나눠 마셨다. 카페 사장님이 우리더러 보기 좋은 가족이라며 웃었고, 우리도 미소로 답을 대신했다. 이후에는 넷이 한번에 만나는 일이 잘 없었다. 간혹 그런 날이 있기도 했겠지만 보통은 둘, 혹은 셋씩 모였다.


그런 우리가 오랜만에 한자리에 모였다. 꿈속에서. 꿈에서도 넷이서 한자리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연속극처럼 한 이야기 안에 함께 존재했다. 아버지만 나오기도 했고, 어머니만 나오기도 했고, 동생과 내가 함께 나오기도 했다. 꿈에서 나는 내내 안절부절못하거나 불안했고 두려움에 떨었으며, 터질 것 같은 가슴을 끌어안고 울었다.


낯선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발신인은 아버지가 사망했다는 짤막한 소식을 전했다. 순간 머리가 멍해지며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고, 바로 믿어지지도 않았다. 서둘러 동생을 찾아 팔을 잡아끌고 큰길로 나섰다. 택시를 잡기 위해서였다. 동생은 무슨 일이냐 물었고,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보기 전에는 믿을 수 없었고, 믿을 수도 없는 비보를 전하기는 싫었다. 실은 자신이 없었다. 동생의 슬픔까지 짊어지고 갈 용기가 없었다. 날은 추운데 택시는 잡히지 않았고, 나는 이제 아무나 붙잡고 병원에 가 달라고 하소연했다. 미친 사람처럼 울고 있는 낯선 이에게 선뜻 친절을 베푸는 이는 없었다(현실에서 동생에게는 차가 있고 운전할 수 있다).


그때 우연히 그곳을 지나던 배우 박정민 씨가 선뜻 함께 가자고 했다(여기서부터라도 꿈인 걸 눈치챘어야 했는데). 박정민 씨와 매니저, 나와 동생은 한 차에 올라 터널을 지나 끝없는 오르막길을 달렸고, 병원으로 가던 중 아빠에게 전화가 왔다. "아빠!" "응, 란아" "아빠!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짧은 대화를 나누며 나는 오열했고, 잠시 후 엄마가 전화를 받아 병원에서 보자고 했다. 나와 동생은 안도하며 병원에 도착했고, 바로 아빠를 찾았다. 병원 통로에서 엄마가 수척한 얼굴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빠는?" "네 아빠 죽었어" "무슨 소리야? 나 아빠랑 통화했어" "아빠가 위독했고 잠깐 깨어났는데, 굳이 전화를 해야겠다는 거야. 말렸는데 말려지지가 않았어. 너랑 통화하고 숨을 거두었어"





숨이 막혀 꿈에서 깼다. 아빠에게 전화하려 휴대폰을 들 때까지도 긴장이 가시지 않았고, 통화 연결음을 들으며 이미 울먹이고 있었다. "여보세요" "아빠아-!" "왜" "보고 싶어어어어어엉엉엉" "…그 말 할라고 전화했나?" "어. 엉엉어엉엉엉" "할 일도 되게 없나 보네. 나 바빠" "아빠 보고 싶어어엉어어엉어" "나 지금 되게 바빠. 끊는데이" 뚝.


눈물은 급정거도 못한 채 눈치 없이 흘러대는데 입에서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눈물 줄기를 달고 부은 눈으로 침대 위에서 배를 잡고 웃었다. 내가 정말로 한심하다는 듯 던진 아빠의 한 마디. "할 일도 되게 없나 보네"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아빠가 살아 있어 기뻤다. 위독하지 않아 기뻤고, 병원이 아니라 기뻤고, 실제로 할 일 없이 늦잠이나 자다가 깨어나 울고 있는 내 모습이 웃기기도 했다. 휴, 살았다. 아빠가 살아 있어서 나도 살아있는 느낌이었다.





아빠와 인터뷰할 때 죽음에 관한 질문도 몇 개 있었다. '당신은 어떻게 죽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드나요?', '생의 마지막 순간, 하고 싶은 말과 듣고 싶은 말이 있나요?', '만약 당신이 1년 뒤에 갑자기 죽게 된다면, 남은 1년을 어떻게 살고 싶은가요? 그 삶의 방식이 현재와 다르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아빠는 '죽음'이라는 단어 앞에서 유독 한숨을 많이 내쉬었다. 슬픔과 허무의 단어들이 한숨을 타고 흘러내렸다. 하지만 아빠와 나누고 싶은 많은 주제 중 하나였기에 빼거나 축소할 수 없었다. 죽음도 삶의 일부니까.


"생의 마지막 순간, 하고 싶은 말과 듣고 싶은 말이 있나요?"


"마지막 순간은 내가 보고 싶은 사람들 다 보고. 응? 옆에서 내가 이래 둘러보고 그래 죽고 싶어"

"하고 싶은 말은?"

"하고 싶은 말은? 사람 어차피 다 왔다 가는 거니까, 그 사람의 운명이고 그러니까, 내가 간다고 너무 슬퍼하지 말고 죽는 날까지 나라는 사람을 기억해 주면 좋겠다고"

"그럼 듣고 싶은 말은?"

"(한숨) 듣고 싶은 말은? 방금 말했듯이 오래도록 나를 기억할 거다. 그리고 내가 있어서 좋았던 이야기. 그런 얘기 해 주면 좋지 뭐"


아빠와의 마지막은 그려지지 않고, 실은 생의 끝까지 그리고 싶지 않은 그림이다. 그 순간이 온다면 오늘 꾼 꿈처럼 흐려지다 흩어지다 사라지면 좋겠다. 그래서 결국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되고, 나는 또 눈물 줄기를 단 채 배를 잡고 웃고 싶다. '아, 뭐야. 꿈이었잖아. 식겁했네' 그렇게 끝나 버리면 좋겠다. 그러나 알고 있다. 누구도 그 순간을 피하거나 거부할 수 없으며, 필연적으로 우리는 이별하게 될 거라는 걸. 그게 이 인터뷰의 시작이었으니, 더더욱 피할 수는 없는 일이다.





아빠는 직전의 인터뷰 질문에 대한 답으로, 잠자듯이 편안하게 죽고 싶다고 했다. 자신이 죽는 걸 인지도 못 한 채 스르륵 잠들듯 죽고 싶다고. 아빠의 바람이 이루어지길 바라며, 잠드는 아빠 옆에서 나는 말해야겠다.



아빠.

오래도록 기억할게. 아빠가 내게 준 것들과 우리가 함께 나눈 시간들을. 아빠가 있어서 참 좋았어. 그래서 실은 아빠가 벌써 이렇게 나를 떠나는 게 너무 아쉽고 서운해. 이런 말을 하면 아빠가 잠들듯 편히 갈 수 없을까? 그래도 서운해. 이 순간이 얼마나 연장되든 이 마음은 똑같을 것 같아. 잠들었다가 다시 깨어나면 좋겠어. 그런데 혹시 그게 안 된다면, 아빠가 쭉 좋은 꿈속에 있으면 좋겠어. 아빠가 있어 좋았던 이야기들을 떠올려보려 하는데 쉽지가 않아. 나는 그냥 '아빠가 있어서' 좋았으니까. 아빠가 존재했고, 고맙게도 내 아버지로 존재해 주어서 나는 행복했어.


내게 좋은 일이 생기거나 내가 아빠에게 선물을 줬을 때, 아빠는 습관처럼 말했지. 아빠는 내게 준 게 없는데 내가 스스로 잘 자라 주었다고. 이제 다음이 없으니 지금 확실히 말할게. 아빠. 아빠는 내게 모든 걸 줬어. 생명을 줬고, 나를 어린이로 키워줬고, 어른으로 만들어 줬어. 아빠가 줄 수 있는 모든 걸 탈탈 털어 줬어. 아빠 스스로는 잊고 산다 해도 나는 알아. 나는 아빠의 청춘을 먹으며 살쪘고, 아빠의 사랑을 느끼면서 자랐어. 조금도 모자란 적 없었고, 다른 누가 부러웠던 적도 없었어.


한때 우리 많이 다투기도 했지. 아빠는 어디서 나 같은 게 나왔냐며 혀를 끌끌 찼어. 나는 일기장에 글씨를 갈겨가며 아빠에 대한 미움을 저장하고, 절대 다시 사랑하지 않을 거라고 다짐했지. 아빠는 어디서 말대꾸냐며 소리를 질렀고, 나는 지지 않고 더 큰 소리로 말했어. 인터뷰를 하면서 짐작했어. 아빠가 유독 화를 많이 냈을 때, 아빠는 삶의 가장 어두운 부분을 지나고 있었을 거라고. 그래서 마음이 약해져 있었고, 순두부처럼 쉽게 으스러졌을 거라고. 화를 참지 못해 현관을 나선 날보다, 숨어 울기 위해 집을 나간 날이 많았을 거라고. 그때 너무 어려서, 아무것도 몰라서 아빠를 위로해주지 못해 미안해. 알았더라면 이해가 안 되더라도 그냥 알았다고, 아빠 말이 맞다고 했을 텐데. 그 시간을 모두 지나온 아빠, 멋있다. 아픈 기억들이었을 텐데 말해줘서 고마워. 슬픈 기억들은 내게 남겨두고 가벼운 마음으로 잠들면 좋겠어. 내게 남긴 슬픔은 걱정하지 마. 아빠에게 있을 때와 같은 무게는 아니니까.


아빠, 기억 나? 대학교 3학년 때 휴학하고 4학년으로 복학할 때. 나 그때 기숙사 신청 기간 놓쳐서 급하게 자취를 했어야 했잖아. 둘이서 대학가 골목을 함께 돌며 내가 살 방 한 칸을 찾아 다녔지. 날씨가 맑았고 그리 춥지도 않았어. 우리는 나란히 서서 조금은 어색하게 이 집 저 집을 둘러보았어. 말은 안 했지만 나는 친구들처럼 깔끔한 원룸 건물에 살고 싶었는데, 아빠는 나를 주택가로만 데리고 다녔어. 그리고 아랫집에 인상 좋은 부부가 사는 주택 원룸을 계약했지. 나를 잘 부탁한다고 말하면서 말이야. 아저씨가 가끔 과일 같은 걸 갖다 줬던 게 생각 나. 혼자 밥해 먹고 사는 게 귀찮고 힘들어서, 보증금을 포기하고 다음 학기에 기숙사로 들어가 버렸지만 말이야.


뭐가 그렇게 귀찮고 힘들었을까. 엄마가 열 가지씩이나 되는 반찬을 만들어 주고, 아빠가 그걸 택배로 보내줬는데 말이야. 어느 날에는 반찬과 함께 택배 상자에 오천 원짜리 지폐가 들어 있었어. 아빠가 택배를 부치고 남은 돈을 상자에 넣어 보낸 거야. 어쩐지 그게 애틋해서 한동안 일기장 뒷면에 붙여 뒀었는데. 아빠는 기억도 못 하지? 아빠는 기억하지 못하는 사랑들이 많을 거야. 그래도 안심해. 그중 몇 개는 내가 기억하고, 소중히 간직하고 있으니까. 아빠와 함께 웃고, 장난치고, 봄에 가을에 함께 산책했던 일들. 대신 아빠는 잊어 줘. 내가 아빠를 속상하게 하고 상처 줬던 일들을. 나는 잊었는데 아빠만 알고 있으면 너무 슬프잖아.


바닥에 엎드려 서진이(당시 유치원생이었던 사촌동생)가 가져온 짱구 만화책을 보며 킬킬거리는 사람이 내 아빠라서 좋았어. 여름이면 속이 훤히 보이는 사각팬티를 입고 돌아다니던 아빠. 바닥에 누워 있다가 벌떡 일어나서 "아, 제발 바지 좀 입고 다녀" 소리를 지르자 "이게 어디서 아빠한테 소리를 질러!" 하고는 방으로 들어갔던 아빠. 그날부터는 꼬박꼬박 바지를 입고 다니는 사람이 아빠라서 좋았어. 기름이 한강인 반찬을 만들어 놓고, 양파에서 기름이 나오는 거라고 우기는 사람이 아빠라서 좋았어(당시에는 한심한 눈으로 아빠를 쳐다봤지만). 설날에 큰집에서 가출한 나를 집에 태워다 주겠다고 내 속도에 맞춰 차를 몰며 차에 타라고 외치던 사람이 아빠라서 좋았어(나는 정말 어떤 인생을 살아온 걸까, 아빠). 새 교과서를 받으면 늘 정자로 이름을 써 주는 사람이 아빠라서 좋았어. 아빠는 때로 나를 답답하게 하고 슬프게 했지만(나만 이상한 건 아니었잖아), 이제는 정말 다 괜찮아. 아빠라는 사람을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겠지만, 아빠도 매 순간이 처음인 어른이었음을 이해해. 그래서 고마워. 아빠의 뒤를 따라 걸으며 살 수 있어서 행복했어.


아빠는 우리가 함께 만든 연속극 안에서 가장 멋진 아버지였어. 엄마는 가장 멋진 어머니였고, 나는 가장 멋진 딸, 진이는 가장 멋진 둘째 딸이었지. 우리는 멋진 가족이었어. 삶의 가장 찬란한 순간도 절망적인 순간도 함께 맞이했던, 꽤나 든든한 동지였어. 아빠를 만나 행복했어. 삶의 행복했던 순간들을 지울 수 없는 것처럼, 나는 아빠를 지울 수 없어. 오래오래 기억할게. 내가 하는 시시한 농담에 웃어줘서 고마웠어, 아빠. 말로, 말이 아닌 것으로 사랑을 표현해줘서 고마웠어. 존재만으로도 든든한 바람막이가 되어줘 고마웠어. 고마워 아빠. 사랑해 아빠. 잘 자, 아빠. 꿈에서 만나. 기름이 나오는 양파를 잔뜩 볶아서, 짱구 만화책이랑 같이 들고 갈게.




아빠가 안녕해 나의 안녕도 무사한 날들을 보내고 있음에 깊이 감사한다.